• 조선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집권능력의 상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북한 미사일사건과 교육부총리 등 일련의 인사 문제로 사실상 집권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집권세력으로서의 권위와 힘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나라를 운영하는 정부로서의 기능도 지리멸렬한 상태다. 이것은 집권 말기에 으레 있음 직한 레임덕 현상의 정도를 넘고 있고 상식적인 권력누수의 현상과도 거리가 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노 대통령과 그의 코드참모들이 보이는 행태를 보면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자기들에 대한 어떤 움직임도 적대적으로 보고 거의 신경질적으로 방어의 바늘을 세워 기회만 있으면 역습을 꾀하는 행태들이 그렇다. 북한 미사일 발사와 관련한 ‘미국의 실패’건(件)에서도 노 정권은 안 해도 좋을, 해서 아무 이득이 없는 도전적 언행을 보였다. 미국의 위정자들이 한·미 관계에 대해 속으로는 멍이 들어가고 있을망정 겉으로는 한·미 동맹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동안, 노 정권 사람들은 뒤로는 결국 미국 하자는 대로 끌려가면서 입으로는 한·미 관계에 불질을 해대는 습관성 행태를 보였다. 마치 그래야 아주 민족적이고 자주적이고 멋져 보일 것이라는 ‘겉멋’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통일부장관이라는 사람이 무슨 절박한 필요가 있어 방송프로에 나와 ‘미국의 실패’를 거론해야 했는지도 모르겠고 대통령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슨 절실한 필요가 있어 ‘그런 말 좀 하면 안 되느냐’는 식의 재탕(?)을 해야 했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 그 문제와 관련, 우리를 향해 어떤 자극적 언행을 해서 우리가 응대할 필요가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왜 먼저 나서 안 해도 좋을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어쩌면 북쪽을 향해 무슨 맞장구를 칠 사연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하게 된다.

    노 대통령이 교육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의 인사 문제를 놓고 온 세상이 들끓는데도 ‘나의 길을 간다’는 식으로 완강히 버티는 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의 오기와 오만을 읽게 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대통령의 참모들은 일을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사람이 휼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대통령에게 도움은 못 줄 망정 누(累)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참모들은 어떻게 보면 어떤 실책이 정권에 영향 미치기 전에 먼저 책임을 지는 소모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 대통령으로서도 비난과 비판의 화살과 물결이 자신에게 미치기 전에 도마뱀 꼬리 자르듯 하기 위해 참모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아주 다른 ‘역(逆)발상의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한 번 도움 줬으면 반드시 갚고 자신에게 피해를 줬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의리’를 지키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는 그런 ‘조직의 보스’가 아니다. 그는 이 나라와 이 국민의 삶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판단과 결정의 기준은 국민이고 나라이다. 의리와 역발상과 겉멋에 심취해 있을 여유가 없다.

    그는 마침내 ‘미국에 그러면 안 되느냐’는 말로 그의 휘황한 언변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고 교육부총리 등의 인사로 ‘역발상’과 ‘의리’의 절정에 오르고 있다. 아무래도 ‘김병준’ 건은 해임 건의안을 둘러싸고 여당의 분열과 정계개편의 모멘텀을 제공할 것 같고, 한·미 관계와 안보에 대한 국민적 불안은 그의 대외정책의 총체적 부실을 대내외에 노정하는 꼭짓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여당의원들로 하여금, 또 같은 논리로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계륵의 고민’에서 벗어나 한쪽의 길을 택하게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판국에 노 정권 사람들은 할 일이 그렇게도 없던지 비판신문의 몇 줄 기사와 제목에 발끈해서 취재협조 거부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꺼내 들었다. 하긴 이젠 기자가 애써 ‘취재’할 일도 없을 정도로 스스로 내리막길로 가고 있으니 그 무기가 쓸모 있을는지도 의문이다.

    노 대통령의 선택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가 여기서 그의 오기와 의리를 접고 사태를 수습하는 날부터 그는 더 이상 기능하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왕 내친 김에 끝까지 버티며 할 테면 해봐라며 나가는 날, 그의 정권은 사실상 무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