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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지방선거 후 노무현 대통령이 한 몇 마디 말에는 분명 언중유골(言中有骨)의 메시지가 있다. 그는 선거 직후 ‘민심(民心)의 흐름’을 말하면서도 “그동안 추진해 온 정책과제를 충실히 최선을 다해 이행하겠다”고 했다. 이틀 뒤인 2일에는 “(선거패배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는 그런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그것이 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패를 당한 집권세력의 대통령으로서 할 말이냐며 ‘반성할 줄 모르는 뻔뻔하고 오만한 대통령’이라고 그를 지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속내를 단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그런 말끝에 그의 지지세력을 향한 듯 “멀리 보며 지혜를 모으자”고 했고, 선거보다 “제도 의식 정치구조 등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고도 했다. 그는 이번 선거 또는 지난 재·보선 등에 일희일비하지 말자며, 2002년 대선 때 ‘선거 마지막 20일까지 역풍 속에 헤맸던’ 자신이 그것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것을 상기시켰다. 이것이 그의 진짜 메시지다. 지방선거나 재·보선 등 ‘예선’에서 백번 져도 대통령선거라는 ‘본선’에서 한번 이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말 뒤에 숨은 뜻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한나라당이 시·도지사 선거를 모조리 휩쓸었다 해도 그것은 ‘권력’과는 큰 상관이 없다. 지방선거는 이 나라의 국방, 외교, 치안, 정보, 대북, 경제를 바꾸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장에 누가 당선되든 속된 말로 천하대세에는 관계가 없다. 물론 선거결과가 집권당과 집권자에 대한 비토의 메시지는 된다. 엄중한 경고일 수도 있고 그동안의 실정(失政)에 대한 레드카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앙정부의 ‘집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지방선거의 한계가 있고 이번 선거의 결과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노 대통령은 작년 8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민심을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과 ‘그 시기 국민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으로 구별했다. 그는 그때 이미 전자를 ‘역사와 미래를 내다보는’ 대통령선거로, 후자를 ‘민심의 흐름’ 정도로 폄하하는 지방선거 또는 재·보선으로 보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그렇다면 집권세력은 이번 지방선거의 대패에 구애되지 않고 내년 대선을 그들 나름의 ‘역사 속에 구현되는’, ‘제도와 정치구조로 이기는’ 선거로 가져갈 수 있는 복안이 있다는 것일까? 그들은 그 해답을 지방선거에서 크게 이겨 기고만장하는 한나라당의 방심과 그 호기(好機)에 편승하려는 대선 후보들의 난립에서 찾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또 내년 대선을 그들의 사활(死活)을 가르는 접점으로 보고 거기서 지면 그들 모두 정치적으로 몰사할 것이라는 ‘막다른 골목’ 의식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저들이 지난 4년여 상대방에 가했던 정치적 보복들, 과거 정권에서 당했던 일이 반면교사가 되어 그들 스스로를 ‘최후의 투쟁’으로 내몰 것이다. 퇴진한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불행은 막아야 한다”고 말한 것에서는 그들 정치적 운명에 대한 비장감 못지않게 한나라당에 대한 저주가 엿보인다.
여기에 야권의 후보가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고건씨 등으로 난립할 때 그들 표가 분산되고 좌파세력이 단결하면 30~35%로도 이길 수 있다고 선거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미 그런 징후는 시작됐다.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인적(人的) 무장’이 끝나가고 있고 어쩌면 2002년 막판의 무대가 재현될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체로 이런 계산과 ‘정치구조’가 이번 지방선거의 참패라는 ‘역풍’을 극복해 보겠다는 노무현 세력의 대선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유례없는 압도적 승리가 곧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퇴장 또는 쇠락과 직결될 것이라고 보았던 사람들은 큰 낭패를 겪게 될 것이다. 그들의 기대감과 안도감은 그저 막연한 감(感)으로 끝날 수도 있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분발, 또는 획기적인 정치이벤트 창출, 그리고 한나라당의 안일한 도취, 반사효과에의 기대, 정책적 무기력, 대권주자들의 분열 등이 맞물려 돌아간다면 이번 5·31선거의 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빛 바랜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