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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 '노트북을열며'란에 이 신문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이 쓴 '정계개편론은 꼼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5.31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제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격랑 속으로 들어간다. 논의는 열린우리당에서 가장 격렬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이미 "민주당과의 당대당 통합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고 했다.
정계개편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합당.통합.신당창당 등이다. 구도를 새로 짜는 정치행위라는 점에선 일맥상통한다. 장사로 치면 신장개업이다. 간판을 바꾸고 인테리어를 고치고 새 물건을 진열하는 리모델링이다.
신장개업은 편하다. 과거가 묻히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는 없다"는 선언으로 시비와 추궁을 피해갈 수 있다. 신장개업이란 화려한 이벤트와 함께 허물이나 잘못이 일시에 '과거형'이 돼 버리는 게 우리의 정치 풍토였다.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하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정계개편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이유다.
정계개편론 뒤엔 그럴듯한 명분이 따라붙는다. 가장 많이 들먹여지는 게 '집권'이다. 재야 출신의 한 중진의원은 "정권 재창출이야말로 최고의 개혁이다.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떤 세력과도 손잡겠다"고 말했다. 정 의장도 "수구적 보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면 평화민주개혁세력이 연합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주변에선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고건 전 국무총리 영입설, 민주당.국민중심당을 아우르는 대통합론 등이 꼬리를 물고 있다. 반(反)한나라당 전선을 만들자는 주장들이다. 여기엔 역전과 반전의 정치 드라마로 거머쥔 2002년 대선 승리의 추억을 들춰내면 등 돌린 지지세력을 다시 결집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열린우리당이 선거 도중 정계개편론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런 속셈에서다. 참패가 확실시되니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고, 그 다음엔 다른 이슈로 빨리 넘어가자는 얄팍한 계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아무리 잘못했다고 사죄해도 유권자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열린우리당의 창당 명분은 지역주의 극복이었다. 2년 전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몰아붙이며 새 정치를 하겠다고 큰소리쳤을 때 국민은 열린우리당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그 과실을 따먹고 이제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민심이 열린우리당을 떠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율배반적 처신 때문이다. 지도부는 입버릇처럼 '진정성'을 외쳤지만 국민에겐 공허하게 들렸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전북당'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선거를 치렀다. 정상적이라면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탐낼 처지가 아니다. 게다가 정계개편의 방법론을 놓고 부산파와 호남파가 충돌하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지금 열린우리당은 개편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다. 이런 차원에서 여당 내의 개헌 주장도 또 다른 꼼수다.
열린우리당은 누구보다 유권자의 무서움을 체험했다. 대통령의 탄핵을 촛불로 지켜낸 지지자들의 위력을 봤고, 또 그 열렬한 지지자들이 싸늘하게 돌아서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그런 점에서 열린우리당은 5.31 선거 전에 이미 지지자들의 심판을 받은 셈이다. 열린우리당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정계개편이 아니라 뼈아픈 자기반성이다. 왜 야당의 탄핵에서 지켜 주고 국회 과반수를 만들어 준 민심이 떠났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고치겠다는 처방이 나온다.
앞서 몇 차례의 재.보선 패배 때처럼 '전통적 지지층이 투표를 많이 하지 않아 선거에 졌다'는 식의 안이한 진단과 그러니 판을 흔들자는 정계개편 처방으로 위기를 넘기려 해선 안 된다. 꼼수는 더 큰 재앙을 부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