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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선민 차장의 “‘올드라이트’는 없다”는 글은 어느 날 등장한 소위 ‘뉴라이트'라는 그룹이 애써 ‘올드라이트' 그룹과 구별지으려고 하는 작위적 구별이 '감정적 대립'이며 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선민 차장은 “‘뉴라이트’와 ‘정통보수’는 각각 자기의 장점을 살리면서 선의의 경쟁을 벌여나가고, 때로는 협력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옳은 지적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뉴라이트'집단은 마치 자신들이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또는 ‘개방적 시장경제주의’를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양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대표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또는 자신들의 ‘선민의식’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이들은 다른 보수주의자들을 '올드라이트'로 구별하고 차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은 ‘귀족’ 집단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편법의 작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내거는 자유주의가 그들만의 새로운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올드’와 구별되는 ‘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념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 또는 개방적 시장경제주의는 모두 정통보수가 주장하는 이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들의 구별은 이념이나 정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남들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인적집단을 차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너희들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엘리트의식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내용은 크게 보아 (1)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았으니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 (2) 자신들이 민주화운동에 공로가 있다는 것 등이다. 설사 이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이유로 자신들이 마치 새로운 이념을 내세운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주장의 내용은 이념 자체의 내용과는 무관하며 단지 자신들의 품성적 또는 행위적 특징을 내세운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의 어느 것도 자신들을 정통보수와 구별되는 새로운 이념의 대표자로 내세우기에는 부족할뿐만 아니라 타당성이 없다. 이들이 소위 ‘올드라이트'라고 부르는 집단의 이념자체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들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일뿐이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특정이념의 본질적 특성이 아니다. ‘뉴라이트’ 내부에도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들은 타락할 기회를 아직 갖지 못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자신들은 민주화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들을 정통보수보다 우월한 새로운 보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화운동'이란 것이 지난 80-90년대의 학생운동을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그 시대의 민주화 운동이란 북한의 대남전략에 따른 반정부투쟁이며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란 소위 ‘인민민주주의’ 다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한 것이었을뿐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그 시대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정통보수와 구별되는 도덕적 우월성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부당하며 근거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과거의 잘못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반성하고 참회하여야 마땅하다. 이들 집단에 속한 인물들 중에는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또는 북한식 공산혁명을 위해 투신하였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이 정통보수와 구별되는 새로운 보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뉴라이트’라는 용어는 단지 자신들을 ‘새로운 정치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이념이 정통보수와 구별되는 ‘새로운 이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새로운 이념을 가진 집단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정통보수의 이념과 구별되는 새로운 이념을 내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토니 불레어가 과거의 'Labor'에서 벗어나 'New Labor'라고 했을 때 그 내용은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이념적 변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스미스의 ‘옛 노동당’이 공산혁명을 주장하였다면 블레어의 ‘새 노동당’은 영국 보수당의 이념과 정책을 거의 채택한 것이었다. ‘올드’와 다른 ‘뉴’를 주장하려면 이 정도의 이념적 전환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지호류’가 주장하는 ‘뉴라이트’는 정통보수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올드라이트’가 내세우지 않았던 새로운 이념을 내세운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정치적 파당적 명분일 뿐이다.
이들이 또한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새롭게 해석해서 부각시킨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 역시 뻔뻔스러운 허구일 뿐이다. 그동안 북한의 군사독재자를 추종하는 친북반역세력이나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었지 정통보수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로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공로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재해석한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차제가 바로 그들이 한 때 북한식 왜곡된 역사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다가 새삼스럽게 두 분 대통령의 공로를 깨달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주장 역시 이들이 자신들을 부끄럽게 생각할 부분이지 자랑스럽게 생각할 부분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니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부터 퇴폐적 사회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예로부터 ‘성’을 가는 것을 가장 심한 욕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는 날부터인가 일단의 정신나간 여성들이 자신들의 성을 함부로 갈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의 이름이 석자로 이루어진 것이 보편적인데 이들은 일본식 이름처럼 넉자로 이름을 고쳤다. 본래 ‘김’이던 사람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김○’식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자신들의 아버지가 ‘김’씨로 알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김’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저 성을 간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부도덕하고 천박한 부류의 인간들이라고 매도할 수밖에 없다. 정통보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념을 내세우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새로운 이념을 주장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도 성을 가는 것처럼 당당하게 뻐길 일은 아닌 것 같다.
도덕적 타락은 보수주의 자체의 특성이 아니다. 특정 개인의 도덕적 타락일 뿐이다. 보수주의 자체가 도덕적 타락을 이념의 구성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의 기본내용일뿐이다. 한 때 북한의 공산군사독재정권과의 대치상태에서 안보의 필요상 또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타율적 질서 유지의 필요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제한 한 적은 있지만 보수주의 이념 자체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며 그 운동방향은 변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북한의 군사독재자를 추종하는 학생운동이야말로 계급독재를 지향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의 학생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거나 또는 민주화 공로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들을 정통보수와 구별되는 새로운 이념을 가진 집단으로 표현하는 것은 선민의식 또는 폐쇄주의의 표현일 뿐이다. 오직 자신들만이 옳고 자신들만이 특정 이념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국민들 호도하는 독선일 뿐이다. 이들이 자신들은 소위 ‘올드’와 구별되는 ‘뉴’라고 내세우는 것은 단지 정치적이며 명분적인 브랜드 효과를 노린 것이지 새로운 자유주의 이념을 창안하였거나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적으로 볼 때 이들이 자신들을 ‘신보수주의’(뉴라이트) 또는 ‘자유주의’를 독점하는 집단일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속임수일 뿐이다. 본질적으로 정통보수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주의, 복지주의, 국제주의 등을 포괄한다. 이념적으로 ‘올드’와 ‘뉴’를 구별할 근거가 없다. 이 개념은 단지 파당적 용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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