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 '김대중 칼럼'란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의아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시작으로 노 정권 사람들의 북한을 향한 발언이나 움직임이 갑자기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북한의 달러 위조에 따른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와 인권압박이 궤도에 오르고 6자회담의 전망이 흐려지자 노 정권의 대북자세는 상당히 주춤해졌다. 거기다가 한·미 FTA협상이 시작되면서 노 대통령이 임기 말 업적에 눈을 돌렸다는 세간의 평도 있었다. 이래저래 노 정권의 대북정책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아닌가 여겨질 즈음, 노 정권은 갑자기 김정일 정권을 향해 여러 추파(?)를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노 대통령이 몽골에서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겠다”며 ‘제도적, 물질적 지원’을 언급하자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남북정상회담을 연내에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에 대한 체제변동 시도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며칠 뒤 한 인터뷰에서 “북한이 우리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면 1조2000억원의 남북교류기금을 모두 쓸 수 있다”고 통 큰 소리를 했다. 그리고 엊그제는 올해 남북관계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불과 10여일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체제변동, 남북교류기금, 남북관계 도약 등 엄청난 과제와 선심(?)을 쏟아낸 것이다.

    위정자들의 발언뿐이 아니다. 남북장성급회담에서는 북측이 드디어 서해안 북방한계선인 NLL의 무효화를 들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측이 NLL의 대안을 모색하는 듯 ‘양보의 기미’가 엿보였다. 느닷없이 민단과 조총련 대표가 끌어안는 사태가 일어나더니 민단이 탈북자 돕기를 포기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평택의 시위에서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매맞고 다치고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총리와 국방장관, 그리고 여당의원들이 보인 행태와 발언은 국민들 사이에 ‘여기가 대한민국 맞는가?’라는 장탄식을 짓게 만들었다. DJ의 때맞춘 방북도 예사롭지 않다. 대한민국의 마지노선(線)이 무너지는 듯한 비감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판국에 지난 18일 북한의 조평통이 ‘남조선 동포 형제들에게’ 보내는 성명을 냈다. 5·31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미국에 추종하는 ‘전쟁머슴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면서 “가장 올바른 판단과 선택은 6·15 평화세력 후보에게 평화표를 찍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뒤 북한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쥘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면 미국의 무분별한 전쟁 책동으로 온 민족이 전쟁참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제야 의아했던 것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시의적절하게 대화(?)가 오가는 것일까. 선거를 앞두고 남북을 둘러싼 객관적 상황에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나 계기가 없는데 노 정권이 느닷없이 김정일 정권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호의적인 제스처를 쓰는 것은 북풍(北風)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라는 의혹을 살 만하다.

    내년 한국의 대선에서 보수·우익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은 김정일 세력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북한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하에서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도움의 정도를 넘어 남쪽에 저들의 기반을 닦는 단계에 있다. 그런데 그 기조와 기류가 바뀌어 남쪽에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게다가 부시 미국정부와 일본내각의 우경화 내지 반북적 드라이브가 당분간 계속 유지된다면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지금 손놓고 있을 처지가 아닐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도 그의 대선 욕망을 꺾어 궁극적으로 현재 예상되는 대선 구도를 바꾸려는 기도로 보는 음모 이론도 가능하다.

    그런 주변사정을 모를 리 없는 노 정권 사람들이 ‘양보’와 ‘제공’을 앞세워 북한에 접근하려는 것은 결코 순수하게 보기 어렵다. 역대 정치세력은 여당이건 야당이건 선거 때면 북풍을 끌어들여 자당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 했다. 북한정권 역시 북풍에 취약한 한국 내 정치풍토와 포퓰리즘을 기화로 한국에 그들의 입지와 발판을 넓혀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양상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내막은 과거와 다르다. 과거에는 다분히 공작적, 선전적 요소가 많았던 것에 비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북풍놀이’는 우리가 양보해서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그 ‘무엇’들을 하나씩 꺼내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줄이고 면역성을 높여 가는 기획적이며 조직적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