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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중진 의원들의 대형 공천비리가 터지자 일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지도부 책임론'이 제기됐고 급기야 일부 초·재선 의원들은 정풍(整風) 운동까지 펼칠 태세다.
한나라당의 시계바늘을 조금만 과거로 돌려보면 소장파와 초·재선 의원들이 정풍 운동을 주장할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다. '최연희 의원 성추행 사건' '이명박 서울시장 테니스 논란' '허남식 부산시장 부인 관용차 사용(私用) 파문' '곽성문 의원 금품수수' '한선교 의원 골프접대' 등 당의 도덕성을 흠집내는 사건이 잇따라 터졌기 때문.
또 이 시장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건들이 박근혜 대표와 친밀한 사이로 여겨지는 의원들에 의해 터졌다는 점은 일부 소장파가 비판의 초점을 박 대표에게 맞추는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결국 이번 대형 공천비리 사건이 그동안 잠재돼 있던 소장파와 일부 초·재선 의원들의 불만을 밖으로 표출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공천비리 원인은 혁신안으로 바뀐 공천제도'
"시·도 마다 기준 달라 공천과정에 비리개입 가능성 더 커져"그러나 이번 공천비리가 '박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책임론'과 '정풍운동' '당의 주도세력 교체'로 까지 확산시켜야 하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지 않는 분위기가 짙다. 당내에서는 한나라당의 공천잡음이 역대 어느 선거때 보다 많이 터지는 이유를 작년 11월 바뀐 공천제도에서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 한나라당은 혁신안을 통과시키며 중앙당이 갖고 있던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과 지방의원 후보에 대한 공천권 중 시·도지사 공천을 제외한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 공천권한을 각 시·도 공천심사위원회로 넘겼다. 이는 당 대표의 공천개입을 차단하고 당 운영을 민주화하자는 것과 지역일꾼은 각 지역에서 선택하자는 지방자치의 뜻을 따르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중앙당 통제가 사라지고 각 시·도 마다 공천기준이 다를 수 있어 오히려 공천과정에 비리가 개입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는 지적이 높다.영입위원장을 맡았던 김형오 의원은 13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분권형 공천의 문제점이 확인된 만큼 중앙당이 공천권을 갖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소위 혁신위안으로 각광을 받았던 분권형 공천제도는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각론이 부족했고 권한의 위임만 있지 권한에 따르는 책임과 절차부분이 미흡했다"며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시·도당에 공천 시스템이 충분히 마련되기도 전에 준비없이 한꺼번에 (공천권을)위임한 것도 문제였다"며 "후보자들은 어떤 원칙에서 어떻게 심사되는지 정보를 알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억측과 잡음이 난무할 수밖에 없어 과거의 적폐인 돈 공천의 망령이 되살아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고 지적한 뒤 "준비없는 분권형 공천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문제많은 혁신안 만든 소장파가 박근혜 책임론 따지는 건 어불성설'
'혁신안의 공천제도는 박근혜 견제용'한 고위당직자는 "지역마다 공천기준이 다를 수 있고 그에 대해 반발이 따를 것은 뻔하다. 결국 책임은 중앙당에 돌아올텐데 왜 이런 안을 통과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당직자는 "어디서든 공천문제는 터질 것이다. 결국 책임은 박 대표에게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른 당직자 역시 "혁신안에 문제가 많았다. 소장파가 주장해서 바꾼 것인데 문제가 생긴 지금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또 친박(親朴) 그룹측에선 "혁신안은 반박(反朴) 세력이 공천권을 각 시·도당에 넘겨 자기 사람을 심어놓기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란 불만도 터뜨리고 있다. 중앙당에서 공천권을 행사할 경우 박 대표의 의중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반박 그룹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공천과정을 바꿨다는 것이다.
물론 공천제도를 개정한 측에서는 이 같은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혁신안을 만든 박형준 의원은 "아직 심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며 "시·도당 공천이 아니라 중앙당에서 공천을 하면 그런 일이 없겠느냐"고 반박했다. 박 의원은 '반박 그룹이 박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서 공천과정을 바꿨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서도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게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 16개 시·도당에 전부 반박 세력만 있느냐"며 "그런 주장이 당 분열의 표본"이라고 비판했다.
어찌됐든 찬-반을 주장하는 양측 모두 아직 분권형 공천제도가 정착될 만한 정치문화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점에는 공감하는 모습이다. 일부 소장파의 지도부 책임론과 정풍운동 주장이 쉽게 명분을 얻지 못하고 중진 의원들과 소속 의원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천제도를 바꾸고 혁신안을 주도한 세력이 바로 소장파라는 점. 숱한 공천비리 문제가 야기될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한 채 정당민주화와 개혁이란 명분만으로 제도를 바꿨다는 점 등이 비판의 골자다.
"현실적 고려없이 대표 권한축소 겨냥해 제도 만들었다"
혁신안 받아들인 박근혜 "공천비리에 일벌백계 수차례 공언"당 관계자는 "소장파가 오로지 대표의 힘을 빼기 위한 정략적 측면에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런 제도적 문제가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공천권이 지방으로 이양되면서 과거 10명 안팎이던 공천심사위원은 180명 많게는 200명 가까이 된다. 로비대상이 늘어났다는 것이고 공천비리가 터질 여지도 그 만큼 늘었다는 것"이라며 "그런 현실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대표 권한축소만을 겨냥해 제도를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런 제도를 만들어 놓고 당시 혁신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반개혁 인사로 몰아붙였다"며 소장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또 이번 사건을 박 대표 책임론으로 연결시킬 명분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당의 중론이다. 대표의 권한이 축소되는 혁신안을 박 대표가 받아들인 만큼 이번 사건의 초점을 박 대표의 리더십 부재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 관계자는 "박 대표는 문제가 있으면 누구든 쳐내겠다는 입장이다. 처음 두 중진 의원 문제가 당에 접수됐을 때도 박 대표는 정확한 팩트를 요구했고 사실관계가 확실한 가운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이번 문제를 접근했다"고 말했다. 또 공천비리에 대해 그동안 일벌백계 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해왔고 이번 대형공천비리 사건에도 정당사상 처음으로 자당 소속 의원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하는 등 대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를 다 했다는 것.
"정풍운동 대상은 오히려 소장파"
이 때문에 당의 중진 의원들과 중도·보수 성향 의원들은 소장파의 정풍운동 움직임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이를 단순한 소장파의 당내 입지강화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중도성향 의원모임인 푸른모임(임태희 권영세. 공동대표)은 14일 성명을 내고 소장파의 지도부 책임론에 대해 "당에 어려움만 가중시킬 뿐 근본적 해결책이 아님을 지적하고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당 관계자는 "정풍운동의 대상은 오히려 소장파"라며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 관계자는 "소장파는 자신들 행동부터 돌이켜 봐야 한다. 그토록 여성 전략공천을 주장해놓고 정작 소장파가 이번 공천에서 자기지역구에서 여성 전략공천을 했느냐"고 되물었다.
지도부 책임론과 정풍운동 목소리를 높였던 소장파는 이런 당내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일단 한 발 물러섰다. 수요모임 대표인 박형준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정풍의 대상이 지도부가 아님을 강조하며 전날 일부 소장파 의원들의 강공을 진화했다.
현재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소장파의 주장대로 정풍운동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조성됐다. 그럼에도 소장파의 목소리엔 여전히 설득력과 명분이 실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