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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공천 비리=일벌백계(一罰百戒)’를 경고해 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검찰 수사 의뢰’라는 극약처방까지 내리며 조기진화에 나섰지만 당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공천비리 연루 의혹으로 당으로부터 검찰에 고발당한 한나라당 김덕룡·박성범 의원은 13일 탈당의사를 밝혔다. 특히 5선으로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노렸던 김 의원은 정계은퇴까지 시사했다.
전날 긴급 최고위원회와 최고·중진연석회의를 잇따라 열고 구청장 공천 관련 억대 금품 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김·박 의원에 대한 검찰 수사 의뢰 결정을 내린 당 지도부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긴급의원총회를 갖고 소속 의원들의 의견수렴에 나섰다. 그러나 이날 의총에 참석한 소속 의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으며 말을 아꼈다.
김덕룡 "공천잡음 죄송하다. 정치적 거취 정리하겠다" 정계은퇴 시사
신상발언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당 지도부를 원망한 박 의원과 달리 뒤늦게 의총장에 모습을 나타낸 김 의원은 “모든 것이 내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라며 “5·31지방선거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공천 문제와 관련해 이런 잡음을 일으킨 점 죄송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머리부터 숙였다.
김 의원은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지난 5일 공천 탈락자들로부터 처음 소식을 들었다”며 “변명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금전 문제와 공천 문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울시 공천심사위원회에 참석해서도 공천심사위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르겠다고 얘기했을 뿐 문제의 그 사람을 공천시켜 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거듭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이어 “경위야 어쨌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므로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며 “끝까지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도 않겠다. 내가 다 짊어지겠다”고 말했다.
5선인 김 의원은 그러면서 “짧지 않은 정치 생활을 하면서 자존심과 명예를 생명같이 생각해 왔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하직 인사를 하게 되니 정말 참담한 심정”이라고 정계 은퇴를 시사했으며 순간 장내는 술렁거렸다.
그는 “당에서 검찰 수사 요청을 한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내 자신이 그런 요청을 하려던 참이었지만 그 파장이 당에 누를 끼칠까 걱정한 나머지 망설이던 참이었다”며 “검찰 수사가 시작될 테니 성실하게 임해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혹시 당에서 필요하다면 나를 축출하는 것까지 달게 받겠지만 스스로 당적 문제나 의원직 문제 또 정치적 거취 등 모든 것을 조속한 시일 내에 정리하겠다”며 “그동안 걱정 끼쳐 드리고 당에 누를 끼친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거듭 머리를 숙였다.
김 의원이 신상 발언을 마치고 발언대에서 내려오자 박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는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으며 의총에 참석한 거의 모든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선배 의원’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모습을 보였다. 김무성 의원 등 몇몇 의원은 국회 본청 밖까지 배웅을 나가기도 했다.
김 의원의 신상발언 이후 소속 의원들 사이 동요하는 모습이 보이자 허태열 사무총장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과거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불가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박성범 "도덕성 훼손한 당 지도부 응분의 책임져야" 항의, 탈당
반면 의총 시작 전부터 성명서를 배포하고 미리 와 기다리던 박 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박 의원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며 “소속 당에서 고발조치가 된 이상 모든 진실이 사법 당국에서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 의원의 주장은 중구청장 공천자가 제공했다는 미화 21만달러를 받은 적도 없고 액수도 당의 발표를 듣고야 알았다는 것이다. 연말 선물로 보내온 재킷과 양주도 공천심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당 클린센터에 보관시켰다고 해명했다. 그는 “진정인들이 3월 10일경부터 당 사무총장실과 클린센터에 여러 차례 방문해 음해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고발조치 등을 유도해 달라는 나의 요구는 묵살되고 당이 오히려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렸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죄’를 주장한 박 의원은 이어 당 지도부에 대한 서운함과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탈당을 선언했다. 그는 “나의 말이 아닌 중상 모략하는 어두운 세력의 말만 믿고 당 소속 의원을 고발조치한 한나라당을 이해할 수 없으며 심히 유감”이라며 “나를 고발한 정당의 소속 의원으로서 진실을 규명할 수는 없기에 당에 대한 마지막 애정을 가슴에 담고 한나라당을 떠나고자 한다”고 했다. 검찰 수사 의뢰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당 지도부에 대한 일종의 항의 표시인 것이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연후에 당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밝힌 박 의원은 “이번 사태를 주도함으로서 개인의 명예를 크게 실추 시키고 공인의 도덕성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시킨 당 지도부는 응분의 정치적·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정도 얘기만 하고 이 자리를 뜨겠다. 안녕히 계시라”는 말을 남기고 의총장을 떠나는 박 의원을 바라보는 동료 의원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으며 3~4명 정도만 악수를 건넬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