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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대통령제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의 여성 정치인, 남편 옥바라지를 하면서 사랑 편지를 수년간 나누던 순애보의 주인공 한명숙 의원이 총리에 오를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이런 발상전환도 그러려니와, 그 과단성을 나는 누구보다 즐기는 편이다. 고등학교 동기가 환경부 장관에 발탁된 것도 그렇다. '범생'의 무리 속에서 그의 총기가 유난히 빛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체육대회마다 화려하게 변신했던 그의 모습을 동기생이라면 누구나 기억한다. 그는 말하자면 자원 응원단장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학입시로 휴업한 사춘기의 치기에 군불을 지피느라 곱사춤을 춰대던 그의 몸짓이 미래의 장관을 예약했는지도 모른다. 인사 발탁의 이런 생동감에 즐거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즐기는 것엔 대가가 따른다. 즐거움 뒤에는 항상 아찔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각을 꾸리는 것은 대통령의 수읽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허를 찌르고 예상을 뒤엎는 묘수가 나올 때마다 국민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스릴을 만끽한다.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선뜻 정승직을 맡기는 아찔한 정치, 그것은 따라야 할 교본도, 읽어야 할 텍스트도 없이 대통령에게 일임된 정치다.
대통령이 정치판을 읽는 촉수가 섬세하면 할수록 누가 참모가 되고 누가 장관이 될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권 초기 행자부 장관에 지명됐던 김두관 군수가 그렇게 유능한 정치인인지 아무도 몰랐고, 강금실 변호사가 '와호장룡'의 장쯔이처럼 강호의 검객을 완벽히 제압하는 무림의 고수인지 짐작도 못했다. 달변가 유시민 의원이 이데올로기 검투사를 자처하고 정책부처의 수장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다행히 이들의 데뷔는 성공적이었거나 성공할 듯도 하다.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건 아찔한 정치다. 능숙한 관리술을 요하는 이 복잡한 시대에, 갑자기 등용된 인사들이 미묘하게 꼬인 현안들을 솜씨 있게 처리할 역량과 식견을 충분히 구비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찔함은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불확실성에 국운을 맡겨야 하는 베팅 정치, 이것이 문제다.
내각제는 국민에게 베팅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당의 수장이 어떤 인물이고 정책편력이 어떤지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꾸리는 섀도 캐비닛의 장관들이 취할 노선과 정책메뉴를 너무나 잘 안다. 영국 총리 블레어는 노동당에 맞지 않게 귀족 가문에 옥스퍼드대 출신이다. 영국 유권자들은 당수를 보필하는 고든 브라운 장관이 노동계급 말투를 쓰고 노동조합의 거친 지도자들과 멋지게 담판하리라는 것을 믿었기에 블레어의 노동당에 표를 던졌다. 그런데 우리의 노무현 후보가 386세대 운동권으로 청와대를 채울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행정 달인으로 불리는 고건을 초대 총리로 발탁한 것도 뜻밖이었는데, 그가 3년 뒤 현 정권을 맹비난하는 대열에 낄 줄은 대통령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즐거움 끝에 아찔함이 증폭하는 시간, 이제 유권자들은 또 다른 베팅을 준비해야 한다. 선수들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수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이 중대한 시간에 대통령제의 불확실성이 또 엄습한다. 불확실성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 자칭 후보들 중에서 대통령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폭발적 인기를 얻어 차기 대통령으로 등극할지 모른다는 신기성(新奇性). 둘째, 대통령이 된 뒤 후보 시절의 자신을 완전히 배반해도 할 말이 없게 되는 유구무언성(有口無言性). 셋째, 누가 대권을 잡더라도 참모 총리 장관을 도대체 예측할 수 없다는 오리무중성(五里霧中性). 신기성은 대중영합주의를 낳고, 유구무언성은 마음의 통증을 선사하며, 오리무중성은 경악과 우려를 자아낸다. 이런 아찔함을 조금이라도 줄여 준다면 대통령제의 활력인 생동성과 과단성을 마음 편히 즐길 수도 있을 터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