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10년이면 나라도 바뀐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경제 평론가 공병호 씨가 ‘10년 후, 한국’, ‘10년 후, 세계’에 이어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을 출간했다. 세 권의 책엔 공통 메시지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도 집단도 나라도 10년을 잘 활용하면 명품(名品)이 된다. 반대로 허송세월하면 이류, 삼류로 전락한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한국 야구는 일본에 14 대 4, 7회 콜드 게임으로 졌다. 예선전적 1승 6패로 탈락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은 야구 월드컵(WBC)에서 일본을 두 차례 꺾고 4강에 올랐다. 종합 전적은 6승 1패. 강산은 거저 변한 게 아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박찬호, 서재응, 최희섭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은 재팬 시리즈에 진출했다. 이때 뿌린 씨앗이 2006년 결실을 거뒀다.

    10년이면 나라 체급(體級)도 바뀐다. 1960년대 초 미국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 2등 국가였다.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고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에 성공하면서 미국을 앞서 나갔다.

    케네디 미 대통령은 1961년 5월 의회 연설에서 “60년대 말까지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겠다”고 말했다. ‘우주에서 소련 따라잡기’ 10년 프로젝트였다. 8년 후인 1969년 7월, 미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선장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뎠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케네디 연설은 달 표면엔 발자국을, 청소년들 가슴엔 꿈을 남겼다. 셜리 잭슨(60) 미 과학진흥위원장은 “내 또래들은 ‘달 착륙 연설’에 꽂혔다. 그래서 이공(理工)계로 몰려갔다”고 회고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직원 1만8000명 가운데 50대 이상이 40%를 차지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들 세대가 20세기 말 미국의 첨단과학기술 시대를 이끌어 왔다.

    우리나라에도 10년 프로젝트가 있었다. 1972년 11월 30일 무역의 날, 박정희 대통령은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하자”고 했다. 그해 수출이 16억 달러였다. 10년 안에 6배로 늘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계획처럼 들렸다.

    대통령은 자기 확신을 접지 않았다. 나라 전체가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해 뛰었다. 오징어에서 유조선까지 외국에 팔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내다 팔았다.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그것도 몇 년이나 앞당겨 달성했다. 국민들은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경험했다. 그때 한국은 세계의 중심무대로 가는 첫 사립문을 열어 젖혔다.
    지도자가 10년을 내다보고 앞장서면 나라는 도약한다. 지도자가 국민 뒤편에 숨어 남의 탓을 하면 나라는 뒷걸음친다.

    1979년 7월, 임기를 1년 반 남긴 카터 미 대통령이 특별 연설을 했다. “생산성과 저축률이 떨어지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빠질 것이라고 믿는 국민이 늘어난다….” 연설 곳곳에 비관(悲觀)이 묻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카터는 각료 4명을 해임했다. 자기 임기 동안 나라 형편이 나빠진 책임을 국민과 참모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후 카터가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 실업률과 물가는 계속 치솟았다.

    카터 연설 비슷한 것을 요즘 이 땅에서 듣는다. “경제가 안 좋은 건 10년 전 IMF 위기 때문”이라는 과거 탓, “20% 강자의 탐욕 때문에 10년 후를 낙관할 수 없다”는 국민 편가르기…. 집권 세력이 뒤만 돌아보고, 안에서 싸움 붙이는 나라의 10년 후는 어떻게 될까.

    “세계로, 우주로 가자. 우리는 갈 수 있다”는 희망의 리더십이 그립다. 2007년 대선에선 ‘명품 한국’을 만드는 10년 비전끼리 경쟁했으면 좋겠다. 그런 비전에 내 한 표를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