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시론 '노정권 역발상의 종착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14일 귀국후 ‘3·1절 골프 향연’의 주인공인 이해찬 총리를 즉각 경질하지 않고 몇시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의장과의 회동에서 총리 경질로 방향을 선회했다. 극적 반전을 통해 사퇴 효과를 높이려는 타고난 순발력이다. 그러나 ‘3·1절 골프 향연’에 숨겨진 고약한 측면은 노 대통령이 극적 효과를 높이려하든 어떻든, 이 총리가 물러나든 말든, 노 정권의 3년에 질려버린 민심은 감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 2일 사건이 표면화된 지 무려 12일동안 이 총리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볼 때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이 진실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략적 후퇴’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 대통령은 총리가 3·1절에 골프치며 부패 상인들과 ‘놀아난’ 데 대해 들끓는 국민 정서의 위선에 처음부터 피가 거꾸로 흐르는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위선을 경멸한다. “너희들은 골프 안치느냐”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 솔직하자. 내기 골프? “윷놀이 할 때도 내기 돈 거는데, 내기 골프하면 뭐가 안되느냐. 너희들은 내기 골프 안치냐.” 노사모가 노 대통령이 8박9일간의 아프리카 순방중 읽어 주길 간곡히 바라며 친노 인터넷에 띄운 사퇴 만류론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이같은 ‘독심법’이 억측인가. 노 대통령이 애초부터 국민의 분노를 공유했다면 사건이 터지자마자 경질을 시사했을 것이고, 시기를 놓친 것을 후회했다면 순방중에도 귀국 후 경질 가능성에 운을 떼어 놓았을 것이다.

    민심은 이 총리가 네번이 아니라 열번을 사과했어도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 총리가 격무에 시달려 혈압이 180까지 올랐다고 하소연을 해도 동정심을 표하는 국민이 있는가. 노 대통령이 이 총리를 쳤다고 해서 권선징악의 상투적인 종말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사필귀정이라며 박수를 칠 국민이 과연 몇명이나 될 것인가. 지금 국민이 사필귀정이라고 느끼는 대목이 있다면 재임 20개월 동안 그렇게 국민에게 표독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던 이 총리의 ‘꼬리’가 잡혔다는 점이다. 현 정권의 부도덕한 이중성을 어떤 연극도 그려내기 어려울 만큼 생생히 보여주는 ‘골프 드라마’를 자칫 관람하지 못할 뻔했다며 안도하는 것이다. 국민은 또 얼마나 이 정권의 ‘위선 열차’에 치이며 시달렸을 것인가.

    ‘3·1절 골프 향연’이 던져주는 본질적인 메시지는 노 대통령의 역발상 작품이 이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이 총리 탄생도 노 대통령의 역발상이었다. 한나라당에서 빼내갔던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를 총리로 기용하려던 역발상이 반발에 부닥치자, 다시 역발상으로 원내 대표 경선에서 패배한 이해찬 의원을 총리에 앉혔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역발상에 이어 양극화 해소 역발상도 실패했다. 왜 노 대통령의 역발상은 종착역에 도달하고야 말았는가. 초등학생들이 저금통을 깨뜨리고 할머니들이 고쟁이를 열어 모아준 ‘희망돼지 저금통’, ‘기타치는 노무현의 눈물’ 모두가 가식이고 위선임을 국민이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노 대통령이 ‘천생연분’이라고 애지중지한 이 총리를 경질해도 국민에게 아무런 감동과 의미를 갖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노 정권 출범이후 최악의 민심 이반 사태다.

    그렇다 해서 노 대통령이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열린우리당이 ‘노무현 차별화’ 정책으로 인기를 만회하는 것을 허용할 리가 없다. 열린우리당이 돌변한다 해도 국민은 코웃음만 칠 것이다. 이 총리를 경질해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회복되기 어렵다.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역발상에 의존해온 자업자득이다. 결국 열린우리당의 남은 카드는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확인한 뒤 유력해 보이는 대권 주자를 중심으로 제 살길을 찾아 헤쳐모이는 것밖에 없다. ‘3·1절 골프 향연’은 열린우리당의 붕괴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