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두아 변호사가 쓴 시론 <'광장서적' 단골들의 배신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사람들에게 이해찬 총리는 전직 교육부장관이자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1980~90년대의 고시생들은 그를 서울 신림동 ‘광장서적 주인아저씨’로 기억한다. 고시전문학원이 생겨나기 이전, 서점은 고시정보 유통의 중심지였고, 그중에서도 그곳은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업계 선두주자였다.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와 고가(高價)의 고시서적을 구입하던 고시생들 사이에는 이심전심으로 공유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광장서적에서 책을 사는 것은 이해찬 의원의 의정활동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지역구 의원이 깨끗한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이렇게 모아진 정성과 성원을 모아 광장서적은 출판사를 겸하는 규모로 발전을 거듭했고, 이해찬 의원은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해갔다.

    그런 이해찬 총리의 골프 스캔들이 연일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몇몇 운동권 출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청년시절 ‘토지소모성 귀족 스포츠’라며 골프를 폄하했던 일을 재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지금 골프를 열렬히 즐기며 자신의 견해가 옳지 않았음을 몸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총리가 골프를 즐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사람들과 부적절한 방법으로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해찬 총리의 사설(私設)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는 듯한 이기우 교육인적부 차관이 연일 해명을 거듭하고, 그 해명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3·1절 골프를 둘러싼 의혹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는 것을 보면, 총리와 그 측근들도 이번 골프가 그다지 칭찬받지 못할 행동임을 진작 알고 있었음이 분명할 터이다. 총리는 말한다. 로비의 정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로비 자체는 없었노라고.

    골프는 정치인과 로비스트에겐 더할 수 없이 긴요한 사교적인 운동이다. 골프라는 운동이 자랑하는 접근성과 기밀성 때문이다. 평소 10분 만나기도 힘든 정치인과 골프를 같이하면 최소한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미국에서 골프 스캔들로 유력 정치인을 낙마시켰던 로비스트 아브라모프의 말처럼 ‘철학과 역사만 논하고 구체적인 현안은 논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시간을 보낸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초반의 극구부인에도 불구하고 내기 골프를 친 일, 목욕탕 이용객들에게 어서 나가달라고 종용한 사실들에 이르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현 정권은 국정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때마다 그래도 도덕성만은 과거 정권들보다 훨씬 높다고 강변했다. 청와대 이병완 비서실장은 지난해 11월 청와대 직원들에게 특강을 하면서 “특히 우리가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도덕적 하자, 부패, 비리 등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어 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산불이 나도, 홍수에 집과 인명이 떠내려가도 이해찬 총리는 골프장에서 웃음 띤 얼굴로 덕담을 나누는데,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도덕 이외에 총리와 여당이 생각하는 도덕이 따로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노무현 정부가 비도덕적이라며 힐난하는 일본 정치가들의 예를 들어보자. 2001년 2월 모리 요시로 총리는 하와이 앞바다에서 일본의 수산고교 어업 실습선이 미국 핵잠수함과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골프를 계속하다가 뒤늦게 관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일에 책임을 통감하고 두 달 만에 정권을 내놓았다. 이 총리를 감싸온 여권 내부에서조차 사퇴 불가피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지금 노 대통령과 이 총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지난 대선 직후, 패자(敗者)측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의 386도 권력에 길들여지면 ‘일급호텔에서 산해진미 즐기고 골프 접대 받으며’ 타락해 갈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총리의 골프와 거짓말 행진을 보며, 노 대통령의 당선을 ‘역사의 부름’이었다고 생각했던 광장서적의 단골들은 누구보다도 아픈 가슴에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