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부산취재본부 박주영 차장이 쓴 <영화 ‘3·1절 골프 사건’ 감상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부산에서 촬영한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사건’은 정말 잘 만든 한 편의 ‘영화’다. 온통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흥행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데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작품성까지 탁월하다.
    이 영화 성공의 요인을 분석하자면 먼저 이보다 더 호화로울 수 없는 캐스팅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주연이고, 100년에 한번 나올까 한다는 고위 관료, 청와대 수석 출신의 교장 선생님, 대학 총장님, 부산의 내로라하는 알짜 기업 회장님들까지 조연들도 화려하다.

    호화 캐스팅이라고 해도 극중에 ‘범생형 상류층’ 캐릭터만 있다면 이야기가 밋밋해진다. 이 영화엔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인맥을 동원, 이를 피하려다 지역 법조계를 뒤숭숭하게 했으나 결국 법정구속되고 실형을 살았던 악역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 캐릭터가 이번에는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 나갈지 궁금하다.

    이런 소재의 작품들이 대부분 정치인과 기업인, 기업인과 공무원, 교육자와 기업인 등을 얼기설기 일차원적으로 엮는 구도인 데 반해, 이 영화는 이들을 다층적으로 복잡하게 얽었다. 그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는 일급 시나리오 작가의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대사도 기가 막히다. “골프장에 갔다 할 수도 없고 안 갔다 할 수도 없다” “라운딩을 하면서 류원기 회장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뜻도 되고, 골프장엔 왔지만 라운딩은 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장면이나 인물이 바뀌면서 같은 사건을 서로 달리 술회하는 대사를 구사해 탐정 영화적 서스펜스의 재미마저 안긴다. “2개월 전에 약속을 했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았다.” 시치미를 떼거나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 시간에 가족 모임을 가졌다” “류 회장은 없었다.” “부산상공회의소 신임 회장단 상견례 자리였다.”(신임 회장단은 아직 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주요 배역들이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는 파격까지 빚어낸다. 집에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된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총장님이나 교장선생님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깨달음의 순간마저 안긴다. 상식 뒤집기야말로 예술성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그러나 그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쏟아졌던 이런 거짓말, 저런 의혹에 대해 엔딩이 가까워오도록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궁금해하고 의아해할 문제에 대해 대중적으로 타협하며 슬쩍 답을 알려줄 만도 한데 철저히 베일로 가린다. 관객의 능동적인 추리 감각까지 적극적으로 살려내는 최고의 연출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관객이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예술 영화들의 ‘소격효과(疏隔效果)’까지 발휘한다.

    하나씩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사건’은 탁월한 영화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성 뛰어난 영화를 보고 나서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어쩐 일일까. ‘사오정’ ‘오륙도’에 파리 목숨으로 생활에 지친 관객들이 저만치 앞서가는 영화 속 배역들의 수준을 못 따라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