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고문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쓴 시론 'DJ 방북에 바라는 것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 방문을 5월 지방선거 이후로 늦춘다는 소식은 여러 면에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남북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다 해도 우리 내부에서의 분열을 조장할 위험이 있는 사업이나 정책은 자제해 가며 상황의 논리에 맞춰 나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빌리 브란트, 폰 바이츠체커 등 서독의 동방정책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은 여야를 초월한 범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한 통일정책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김 전 대통령의 결정은 역시 경륜을 높이 쌓은 지도자가 국민의 걱정을 헤아려 내린 신중한 선택이라 하겠다.

    이미 정부 관계자들이 여러 번 밝혔듯이 김 전 대통령의 예정된 방북은 정부를 대표하거나 특사자격으로 계획된 공식적 행사는 아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자신의 방북은 순수한 개인의 자격으로 준비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신분으로 북한 지도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 방북이 갖는 특별한 의의가 아닐까.

    우리 정부는 북한 측에 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남북 관계를 악화시키고, 대화를 단절시킬 우려를 감안해 말을 삼가고 있는 실정으로 이에 대한 국민의 양해를 구할 뿐만 아니라 핵이나 인권 문제 등을 잘못 제기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논리의 비약까지 서슴지 않는 형편이다. 그러기에 당국 간 대화에서 정부에 주어지는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여러 모로 자유로운 김 전 대통령의 경우엔 별다른 위험부담 없이 솔직한 의견교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한편 이번 방북은 김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나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와 무게를 십분 활용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재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운 민주화 투쟁의 기수로서, 그리고 단 한 사람의 권리도 유린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인권운동가로서 김 전 대통령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로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해 노구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어가 간곡한 당부를 한다면 과연 북의 지도자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예단키 어렵다.

    오늘날 북한체제를 압박하고 있는 내외 여건의 굴레로부터 헤어나기 위해서는, 더욱이 남쪽으로부터의 이해와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북쪽은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우선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비핵화 공동선언의 원칙으로 회귀하는 결단이 하루속히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함께 살고 있는 7000만 우리 민족의 안전을 최대한 도모하는 최상의 길은 핵무기의 제조나 배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는다던 14년 전의 약정을 남북이 예외없이 지켜가는 것이다. 북측이 이러한 민족적 약정을 반드시 이행하기로 결심만 한다면 남쪽은 이에 적극 협조할 것이다.

    둘째, 국제사회가 인류 보편의 가치로 강조하는 인권 문제를 북한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취급하기보다 중국의 예와 같이 인권 문제에 대한 세계적 관심에 유의해 인간중심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등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예부터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인본주의적 규범을 소중히 지켜온 우리 민족 사회에서는 더욱더 이 문제를 남북이 함께 걱정하며 풀어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셋째, 세계화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된 우리 시대에 이미 널리 수용되고 있는 보편적 기준을 무작정 무시하는 자세는 결코 이롭지 않다. 이른바 위폐 문제를 포함해 논란의 대상이 된 예민한 문제들은 우선적으로 국제적 기준을 존중하는 자세로 임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며 우리도 이에 적극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우려와 충고를 간곡하게 말할 수 있는 권위와 지혜를 갖춘 지도자로는 아마도 김 전 대통령이 제일 먼저 꼽힐 것이다. 항상 요동치는 정치의 무대에서 물러나 정치인생의 무상을 이미 터득한 원로로서 김 전 대통령은 지도자는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북쪽 인사들에게 몸소 보여주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어떻든 그의 방북 계획을 둘러싸고 서울이든 평양이든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