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정치부장이 쓴 컬럼 '노 대통령이 잘 한 일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3년에 대한 평가는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요즘 노 대통령은 시중의 화제에서도 멀어져 있다. 이제는 노 대통령이 민감한 말을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디서 “노 대통령이 잘 하는 일도 있다”고 말하려면 눈치를 봐야 할 정도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 ‘70’이라면, 잘한 것도 ‘30’은 있다. 잘한 ‘30’을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상감마마 납시오”와 같은 대접을 받아 왔다. 그런데 어느 새 우리는 그 폐해의 심각성에 점점 둔감해져 가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그런 제왕적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잘 아는 사람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해도 과거 대통령들이 검찰을 정권의 사냥개로 부리던 시절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도 검찰 정치가 있지만 그 정도와 빈도는 줄었다. 정치인 관련 사건 때마다 나오던 ‘정치 보복’ 논란도 줄었다.

    여당이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로 불린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과거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조금 더 정상화된 것이다.

    정치자금의 규모가 줄었다. 이미 지난 대선 때 대선자금 규모는 현격히 줄어들었고, 그 추세는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석에서 만난 정치인들의 돈 타령은 과거에 비해 분명히 줄었다. 그에 비례해서 권력형 부패사건도 건수와 규모가 모두 줄었다. 권력형 부패는 대개 임기 4년차 들면서 시작되거나 드러나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부패사건이 드러난다 해도 그 규모는 과거에 비해 작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노 대통령이 재벌 돈 수천억원을 받아서 여당 정치자금으로 쓰고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대 정권마다 지역 편중 인사가 큰 시빗거리였다. 노 대통령도 지역을 정치적으로 고려한 인사를 하고 있다. 출신 고교 얘기도 많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약해졌다. 대신 코드 인사가 문제되지만 ‘어느 지역 싹쓸이’라는 식의 얘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국가의 오랜 숙제였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 선정에 성공했다. 부안사태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결과다. 이때 선보인 주민투표제는 앞으로 유용한 제도로 정착할 가능성이 있다.

    지지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파병하고 쌀 협상 비준을 추진한 것, 갈등과 부작용이 예상되는데도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 것도 평가받을 일이다.

    노 대통령이 결과적으로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말만 한다는 비판이 많다. 근거 있는 비판이지만 지난 3년간 한·미 간의 해묵은 문제들이 합의되고 해결된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폭로된 외교 기밀 문서에서 드러난 노 대통령의 속 모습은 “반미 좀 하면 어떠냐”던 겉모습과는 달랐다.

    노 대통령도 북한을 국내 정치에 이용할 것인지, 개인적으로도 관심사였다. 지난 3년간 북한에 끌려다니는 일은 여전했지만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북한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 오히려 손해라고 계산하는 것 같다. 정권 핵심 관계자가 국회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해도 선거 때는 피할 것”이라고 답한 것은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대북 비밀송금 특검을 수용해 남북 뒷거래를 파헤치게 한 것도 노 대통령이었다.

    이런 일들은 노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가로 막았다면 잘 되지 않았을 일들이다.

    노 대통령이 잘 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것이 많은 특징이 있다.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안한 것이 업적이 됐다는 얘기다. 여기엔 적지 않은 시사(示唆)가 있다. 일할 수 있는 임기 마지막 해를 보내는 노 대통령도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