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칼럼 '가난에 대하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위하여 소개합니다.

    생로병사를 제외하고 인류를 가장 괴롭혀 온 것은 가난 문제일 것이다. 폭정시대를 제외하고 정치의 주요 관심은 가난의 해결이었다. 종교 역시 현세의 문제에서는 가난한 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관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가난의 문제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다. 절대적 빈곤은 어느 수준 해결이 가능하다. 나라가 전체적으로 부강해지면 절대적 빈곤은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이 정부가 주장하는 양극화 해결이 이러한 절대빈곤을 없애자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따라야 한다. 기초생활자와 차상급 빈곤계층이 700만에 달한다니 나라가 능력이 생기는 대로 이들의 절대빈곤 상태는 해결해 줘야 한다.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이들이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을 해소하는 문제는 좀 복잡하다. 심리적 사회적 의식적 측면이 얽혀 있다. 생활수준으로 볼 때는 분명히 과거에 비해 잘살게 됐는데 주변과 비교할 때 못 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는 까닭은 절대적 빈곤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다. 상대적 빈곤감에서 오는 가난의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간단치 않다. 똑같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아마 북한에서는 모두가 가난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감은 우리보다 적을지 모르겠다.

    세상은 묘해서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온다. 이기적 인간들을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제가 필요하다. 강제는 권력의 확대를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공산주의가 독재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큰 정부의 권력이 커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권력의 힘으로 이기적인 자본가를 없앨 수는 있지만 그 빈자리에는 권력자가 대신 앉을 수밖에 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평등은 실현될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개인의 자유는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은 긴장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상대적 빈곤을 해결키 위해 평등을 강제하게 되면 평등하게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못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좋은 의도로 한 일일지라도 결과는 정반대로 나온다.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실패가 그 예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등을 강제하는데 누가 잘살기 위해 애쓰겠는가. 함께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청와대가 홈페이지에 '따뜻한 사회, 비정한 사회'라는 제목으로 양극화 문제를 거론했다. 이 캠페인이 절대적 빈곤을 타파하자는 것이라면 환영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절대적 빈곤층 얘기를 하면서 슬며시 상대적 빈곤감, 즉 상대적 불평등에 대해 부채질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잘나가는 20%, 희망이 없는 80%'로 대비시키면서 "소수의 승자만 존재하고 다수의 패자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로 부각시키고 있다. "경제의 강자는 밀림의 사자보다 100배, 1000배 잔인하다" 면서 이 나라가 '비정한 사회'라는 것이다. 왜 상대적 빈곤감을 부각시키는 것일까. 정말로 우리 사회는 그런 불행한 사회일까. 말이 그럴듯해 양극화이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빈익빈 부익부'라는 구호를 자주 들어왔다. 그때는 야당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 지금은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한다. 왜 이 정부 들어 더 나빠진 경제, 분배구조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는 말은 없는가.

    상대적 빈곤감은 정부가 나서서 분배에 앞장선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세상은 돈 이외에도 값진 가치들이 넘친다는 것을 알면 돈이 적다는 것이 큰 문제가 안 된다. 각자가 좋아하는 길, 잘하는 길로 가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바로 가치의 다양화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은 말 그대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가진 자들이 겸손하면 해결할 수 있다. 부를 과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으로 생각하고 조심한다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소박한 진리처럼 부를 스스로 나눌 수 있을 때 가난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