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란에 이 신문 오병상 문화데스크가 쓴 '역사가 뭐길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82년 초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서 전대미문의 이변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서 학과를 지원했는데, 10개과 가운데 사회학과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다. 항상 최고점수를 자랑하던 경제학과가 2등으로 밀렸다. 이후 사회학과가 경제학과보다 커트라인이 높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이변은 당대의 사회적 산물이다. 당시 사회학과는 투쟁을 모의하고 혁명을 꿈꾸던 곳이었다. 절정에 달한 전두환 군부정권의 폭력성은 대학생들에게 취직.출세보다 투쟁.혁명을 먼저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386은 그렇게 자랐다. 그 무렵 386의 정신세계를 압도한 책을 꼽자면 서슴지 않고 '역사란 무엇인가'(이하 역사란)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이라 말하겠다. 역사책은 세계관.인생관을 바꾸는 힘이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쓴 '역사란'이 먼저다.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 주는 역사철학서다. 간단히 줄이자면, '역사란 역사가들이 현재의 눈을 통해 과거의 사실들을 선택하고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은 진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한다.

    '역사란'을 읽고 '해전사'를 읽으면 앞뒤가 꽉 맞춰진다. '역사란'이 가르쳐준 역사관에 담기에 안성맞춤인 내용물이 '해전사'다. '해전사'는 좌파.민족주의 성향의 학자들이 미래의 진보를 상정하고 역사를 해석한 책이기 때문이다. 무리하게나마 '해전사'의 역사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해방전후사(1945~53년)는 실패한 혁명'이다. 혁명의 주체는 민중 혹은 좌파 지식인들이며 혁명을 좌절시킨 반혁명 세력은 친일 기득권층과 미국이랄 수 있다.

    유신과 5공 시절 중.고등학교에서 입시용 역사만 배우다가 '역사란'과 '해전사'를 읽으면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독재와의 투쟁, 민중을 위한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이가…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한다"고 얘기한 대목은 정확하다.

    문제는 E H 카의 가르침처럼 시대가 바뀌면 역사도 바뀐다는 점이다. '해전사'가 386의 피를 끓게 했던 시절은 이미 20여 년 전 일이다. '역사란'(역사를 보는 눈)은 바뀌지 않더라도 '해전사'(역사 해석 내용)는 바뀌어야 할 때가 이미 지났다. '해전사'가 묵시적으로나마 그렸던 미래의 진보는 사회주의였고, 성공한 혁명은 북한 정권이었다.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북한의 참상은 확인됐다.

    그런 점에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의 등장은 주목된다. "'해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을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이대로 두고 보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머리말엔 더 크게 공감하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총리의 신사참배는 동북아의 불안 요인이다.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회장은 신사참배를 계속하는 고이즈미 총리를 "역사를 모른다"고 꾸짖었다. 최근 중국 정부가 '언론탄압'이라는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주간지 '빙점'을 정간시킨 것도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글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청산을 밀어붙이고, 뉴라이트 시민단체가 이를 비판하는 학술행사를 연 것도 역사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역사책 읽길 권하고 싶다.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