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그룹은 지난 2월 7일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0207결단’을 발표했다. 이 결단을 통해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의 사재 8000억원을 ‘조건없이’ 사회에 환원하고 지금까지 해 온 사회 공헌 활동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하였다. 이 결단에는 공정거래법 헌법 소원 및 삼성 SDS BW 증여세 부과처분 취소 소송 취하, 계열사 독립경영 강화, 삼성전자 등 핵심 계열사의 경영권 방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해 온 정치권의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에 대한 수용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삼성의 이러한 결단이 삼성에 대한 부당한 사회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동안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으로서 이룩한 성취와 국민 경제에 대한 막중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의 막중함 때문에 여러 사회 집단의 경계를 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삼성의 위상과 활동이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삼성의 ‘0207결단’은 이러한 ‘국민 정서’를 바로 잡기보다는 그 정서를 존중하면서 자기 혁신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성의 이러한 결단을 계기로 삼성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되고,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어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우리 국민이 정신적․도덕적으로 성숙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 정서에 화답하는 삼성의 결단을 환영하면서도 이것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삼성의 ‘0207결단’을 계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성찰해보아야 한다.

    첫째, 그동안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해외유학생을 지원해 온 삼성 장학재단 기금 4500억 원이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운영 주체와 방향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이 돈이 우수한 인재 양성과 거리가 있는 사업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8000억 원의 운영 주체와 운영 방안은 정부가 시민 사회와 논의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8000억 원은 국가의 장래를 고려한 원대하고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양극화 해소’와 같은 평준화 지향적인 곳에 사용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심이 장기적인 국가의 장래를 고려하여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이 아니라 인위적인 평등을 추구하여 국가의 성장 동력을 위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공정거래법 일부 조항에 대해 제기했던 헌법소원을 취하한 것이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것이 설사 국민 정서에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합리적인 사회의 건설과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공정거래법 일부가 명백히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국민 정서보다는 법의 지배 원칙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인 사회적 인식에 밀려 삼성이 헌법 소원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삼성이 우리의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좀더 합리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에 역행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합리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 한 기업이 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다. 기업의 원래 목적은 합리적인 사회 건설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성의 ‘0207결단’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인식의 틀’이나 ‘국민 정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지배 구조, 특히 소유경영체제 및 경영권 승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경영권 승계와 관련하여 빚어진 불행한 과거 때문에 소유경영체제는 전문경영체제보다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지할 수 있는 도덕적이거나 경험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소유경영체제와 전문경영체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양자의 우월성은 경험을 통해 판단할 문제이다. 어느 체제가 더 좋은가는 상황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기업의 지배 구조 특히 소유경영체제 및 경영권 승계의 논란은 기업의 본래 목적인 경쟁력을 강화하여 얼마나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고용을 창출하면서 장기적으로 잘 생존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제도의 우열을 결정할 줄 아는 합리적인 태도를 길러야 한다. 

    삼성은 ‘0207결단’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삼성이라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좀더 인간답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현재의 입장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삼성의 ‘0207결단’이 우리 사회가 좀더 성숙하고, 집단의 이해 관계를 넘어 ‘우리’의 관점에서 역사와 사회 현상을 통찰할 수 있는 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