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긴 침묵을 깨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인가. 이 전 총재가 최근 심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가며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 오던 이 전 총재는 25일 공식석상에서 현 집권세력을 향해 “친북 좌파세력” “반통일·수구세력” 등 높은 수위의 비판발언을 쏟아냈다. 이 전 총재는 그동안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냈을 뿐 정치적 발언으로 이목을 끈 것은 대선 패배 후 정계를 은퇴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얼마 전에는 ‘정계복귀 기자회견설’까지 나왔던 상황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이 전 총재는 이날 서울 서초구 외교센터에서 열린 전 북한 노동당비서 황장엽씨의 ‘민주주의 정치철학’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김대중 정권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친북좌파세력이 득세하면서 나라가 분열과 갈등으로 뒤범벅이 됐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인권 존중을 핵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체제의 미래에 대해 국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고 햇볕정책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북한의 개혁개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실패했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러면서 “금강산 관광 사업이나 개성공단 건설, 경원선 철도 연결 등은 남측의 투자내용일 뿐 북한체제의 개혁개방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햇볕정책을 계승했다는 현 정권은 대북정책의 명분에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빼버린 것 같다”며 “북한 독재체제의 변화는 이미 이 정부의 관심사항이 아니며 오히려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일갈했다. 그는 이어 “이 나라는 북한의 자유와 민주화를 주장하거나 무원칙한 햇볕론을 비판하면 반통일 세력이니 수구세력이니 하는 말을 듣게끔 돼 버렸다”며 “이렇게 몰아붙이는 자들이 오히려 반통일 세력이고 수구세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비난했다.

    이 총재의 축사를 들은 황씨는 “이 전 총재는 다년간 시련에 찬 정치활동을 통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정치인”이라고 칭찬한 뒤 “이 전 총재는 앞으로도 사심 없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내에서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이 전 총재의 이 같은 정치적 발언은 정치권에 갖가지 해석을 낳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전 총재의 측근인 이종구 전 언론특보는 “황씨와 그동안 친분이 있었고 출판기념회를 주최하는 단체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한편,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사립학교법 무효투쟁으로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사학법 투쟁은 국가 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근본 뿌리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사학법 무효투쟁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