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송호근 칼럼'에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쓴 칼럼 '화두정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영국의 대처 전 총리, 그는 1979년 집권하자마자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통치이념을 실천에 옮겼다. 프리드먼을 신봉하던 보수이론가 케이트 조셉과 당정책연구소에서 갈고닦았던 정책 대안이었다. 노동법을 여덟 차례나 개정했고, 공기업을 가차없이 매각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조세를 세 차례 개혁하고 복지요건을 강화했다. 국가경쟁력위원회의 처방에 따라 정보기술(IT)과 금융산업에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 그것은 주효했다. 당시 두 나라는 오늘의 한국처럼 1인당 국민소득 1만5000달러를 통과하고 있었다.

    보수주의가 이 시대의 대안은 아니다. 대통령의 신년사를 들으면서 고군분투하던 레이건과 대처, 그리고 격랑을 헤쳐가던 80년대 유럽 국가들이 떠오른 것은 그들의 치밀하고 탁월한 통치력이 부러워서였다. 좌파 정부든 우파 정부든 그들에겐 당대 최고 이론가들이 있었고, 정책역량과 실천의지가 충만한 집권당이 포진했다. 꾸물댈 여유가 없었다. 실정(失政)은 실각이자 국운(國運)의 파기였다. 준비된 정당이 준비된 정책으로 준비된 미래를 제조했다. 10년의 개혁정치로 80년대 말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2만 달러 고지를 훌쩍 넘었다. 

    신년사는 솔직담백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목말라하는 것은 대통령의 솔직한 고백이나 사회 쟁점에 대한 재확인이 아니다. 그 쟁점들이 절박하지 않았다면 진보정권이 탄생했겠는가? 한국 사회의 병증을 조목조목 담아낸 신년사는 안타깝게도 입시생의 면접준비용 참고서 같았다. "복지 증진을 위해 세금을 올리려는데 감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옳은가?" 또는 "양극화 해소에는 일자리 창출이 주효한데 방안을 말해 보라"는 면접교수의 주문에 망설이며 내놓는 입시생의 답변, 그것이었다. 현 정권의 '작은 치적'은 분명 인정되지만, 집권 3년 동안 '답안 논의 중'이라면 참여정부는 운만 떼온 '화두정부'였다는 뜻인가. 

    고승(高僧)의 화두에는 답이 없어도 좋다. 중생이 깨달으면 그만이다. 정권이 화두를 던질 때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 화두 덕에 다수 여당이 탄생했고 정책 중심이 복지와 분배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책여건이 이만큼 잘 갖춰진 상황에서 DJ정부의 복지업적에 무엇을 더 보탰는지 묻고 싶다. 대통령이 열거한 '치적' 뒤에는 그늘이 짙다. 병원비 절반은 여태 개인 부담이고, 정부 퇴직자를 제외하고 연금 수혜 고령자는 지극히 적다. 출산지원비 20만원으로 아이 낳기를 기대하는가? '사교육비 해방'은 희망사항이고, 노부모 봉양의 짐이 또 얹힌다. 안전망? 글쎄, 빈곤율은 늘었고 청년실업도 여전하다. 유럽과 비교해 증세를 말하려면, 한국의 국민부담률(25%)을 약간 웃도는 세금으로 80년대 유럽은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일궜다는 사실을 얘기해야 한다. 아무튼 계류된 연금법을 방치해 두는 여당의 소란스러운 정치인들, 증세만이 유일한 방책으로 아는 현 정권의 정책전문가들이 그래도 변명거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면접교수가 누구든 문제만 열거하는 학생에게는 기본점수도 주지 않는다. 대신 10여 가지의 당면 과제가 '모두 해결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면 후한 점수를 얻을 것이다. 가령 대통령이 가장 고심하는 문제를 "서비스 직종의 확대" "비정규직 차별 해소" "연금개혁 및 복지서비스 확대"라 치면, 이것을 '일괄 타결한' 선진국은 하나도 없다. 성장, 분배, 복지재정에 각각 해당하는 이 세 가지 쟁점은 충돌을 일으킨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서비스 부문을 죽이고, 복지재정을 위해 증세하면 경제가 위축되고 비정규직 수요가 되레 늘어난다. 이것이 세계의 모든 국가를 골탕먹이는 이른바 트라이레마(三者擇二의 딜레마)인데, 어떻게 돌파한다는 정도는 밝혀야 하지 않는가. '잘해 봅시다'로 마감된 신년사의 논조에서 '정책국가'다운 면모가 감지되지 않는 이유다. 화두는 방향을 시사할 뿐 정책을 선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