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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백화종 칼럼'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박근혜 길들이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기자의 고향에서 있었던 얘기다. 어느 집에 나이 들어 본 고명딸이 있었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다보니 아이의 음식 까탈이 여간 아니게 됐다. 가족들 사이에 아이의 버릇을 고치자고 의논이 이뤄졌는데 마침 아이가 밥상머리에서 또 징징대는 것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아이를 외면한 채 식사를 마쳐버렸다. 혼자서 울음을 그치는 것도 겸연쩍고 난처해진 아이는 엄마에게 다가가 이번 한 번만 달래주면 다시 울지 않겠다고 사정을 했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버릇 고치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박 대표를 심하게 까탈부리는 고명딸 쯤으로 여기고 말이다. 그러기에 박 대표가 사학법 개정에 항의하여 엄동설한에 소속 국회의원과 함께 거리로 나선 때에 예산안 등을 처리한 것 아니겠는가.
우리 고향에서는 아이가 징징대도 아이의 밥만은 남겨 놓았다. 그러나 여당은 이번에 마치 밥상까지 깨끗이 치워버린 것 같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여당으로서는 야당의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정 운영의 심각한 차질을 막기 위해 그 방법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수적 우위를 무기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정치가 아니다. 대통령 탄핵안이 야당의 수적 우위로 통과됐을 때 열린우리당이 내세웠던 논리에 비춰봐도 그렇다. 그리고 가족들의 외면에 쉽게 손들었던 우리 고향 아이와는 달리 박 대표가 길들여지기는커녕 그의 정부·여당에 대한 태도가 한층 강경해질 게 뻔하다.
여당은 우선 사학법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야당과 사학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 더 진지한 태도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사후에라도 신축성 있는 자세로 야당을 테이블 앞으로 이끌어야 했다. 사학법 개정 찬성 의견이 더 많다는 일부 여론조사를 내세우며 야당에게 마음대로 해보라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었다. 여당은 또 예산안이 해를 넘겨 준예산을 집행하는 게 위헌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준예산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여 헌법에 규정해 놓은 제도로 위헌이 아니다.
이번 한나라당의 강경 장외 투쟁의 효과인지 박 대표는 그 위상이 제고되고 이명박 서울시장과의 대선주자 경쟁에서 다소 유리해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그렇더라도 기자는 한나라당이 사학법 개정 반대 투쟁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장내를 완전히 포기하는 지금의 투쟁 방식엔 회의적 입장이다. ‘개헌 논의 불가’처럼 장내에서는 합법적 투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됐던 옛날 권위주의 시절만큼 여러가지 상황이 절박한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나라당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사태 수습의 책임은 국정운영의 주체인 정부·여당의 몫이다. 한나라당이 장외 투쟁을 하다가 지치면 오히려 달래달라고 사정할 지도 모르니 그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사학법 재개정의 여지를 보여 주든지, 고위급 회담이나 물밑 대화를 통해서든지, 한나라당이 장내로 돌아올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의 예산안 처리 등으로 장외 투쟁의 깃발을 든 박 대표가 운신할 폭은 좁아졌다. 5월 지방선거 주도권을 놓고 여야의 강경 대립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김근태씨 등 대선 예비주자들의 당 복귀와 개각 등으로 정국 정상화에 소홀해질 수도 있다.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당은 다수결 원칙에 따라 국정을 처리해가는 것으로, 야당은 승복할 수 없는 결정에 강경 투쟁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는 고명딸 까탈부리듯, 또 그 고명딸 버릇 고치듯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흔히들 정치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고난도의 종합예술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침 여당의 실세들이 돌아온다. 여당에 복귀하는 지도자들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이 경색 정국을 풀어낼 종합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갖췄는지 대선 관문의 첫 시험대로 삼는 건 어떨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