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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신년시론란에 유종호 연세대학교 특임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칠 줄 모르던 강추위와 폭설이 뜸하다 싶더니 이내 세모요 새해라 한다. 모범택시 미터기 돌아가듯 가슴 철렁하게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세상을 흔드는 큰 사건들이 세월의 물살을 더 빠르게 하는 것도 같다. 빠른 세월에 대한 심층적 저항 때문일까, 요즘은 옛 역사책 보는 것이 취미가 돼 버렸다. 문학과 역사는 본시 하나였으니 역사를 문학처럼 읽는다 해서 크게 책잡힐 것은 없으리라.우리 역사를 읽으면서 놀라게 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가령 고려 말년에 왜구가 심해서 고려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교과서로 배운 바 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왜구 침범의 빈도와 광역화는 상상 밖이다. 공민왕 9년에는 강화도를 침범해서 주민 300여명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 갔다. 개성에서 가까운 해주·강화·양천을 침범했으니 집 앞마당까지 들이닥친 셈이다. 무사한 해가 없었고 침범 범위도 평안도 안주에서 동해안의 강릉, 호남에서 충남까지 광범위하였다. 조선조 들어와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진란의 참화는 고려 때의 피해를 웃도는 것이었다.
임진란 전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명나라 사기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고치기 위해 조선조에서는 끈질긴 노력을 기울이었다. 근 200년에 걸친 조공과 로비 활동 끝에 중수 대명회전에서 교정에 성공하였다. 공을 세운 윤근수 등 19명에게 광국공신이란 훈명을 내리고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임진란이 나기 2년 전인 1590년의 일이다. 이성계 아비 되찾기 노력의 절반의 절반만 왜구에 대해 기울였어도 저 ‘인상식(人相食)’의 참혹한 비극은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책 수행의 우선 순위가 뒤바뀌었고 또 가까운 과거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가 전혀 없었다. 지배층은 중국 역사는 공부했지만 제 나라 역사를 읽은 것 같지 않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국난을 당했던 선조·인조·고종 등 국왕들이 저희 일신의 안전 도모에는 급급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진정으로 걱정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한결같이 우매하고 후안무치한 암주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신라 경순왕에게는 왕자의 면모가 보인다. 정권의 말기 증상이 짙어지자 경순왕은 고려에 귀속하기를 제의했고 중신 중에는 반대자들이 있었다. 특히 뒷날 마의태자로 알려진 왕자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왕 강하지도 못하고 또 더 약하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며 경순왕은 고려 귀속 절차를 밟게 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역사 바로잡기니 과거사 정리니 해서 요즘 역사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극은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의 하나요, 또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해서 화제에 올린다. '통감'이란 말이 보여주듯이 동양 전통에서 역사는 거울이었다. 냉혹한 역사 앞에서 가장 겸허하게 자성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들은 위정자들이다. 그들이 역사를 거울삼기는커녕 역사를 열광적 집단주의를 부추기거나 정치적 센세이셔널리즘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성향이 보인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의 비역사적 오용이요, 오작동이다.
집단적 죄의식을 소수 인사들에게 투사해서 속죄양을 만드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관행이다. 부관참시로 민족정기를 세우겠다는 것은 조선조 명분론의 아류적 사고요, 조선조 역사의 한심한 되풀이다. 역사를 기억하라는 것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지 역사를 입맛대로 편집하라는 말이 아니다. 해방직후 연기를 피해서 불길로 뛰어든 비극적 인물들이 걸핏하면 역사를 들먹인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