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에 실린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29일 농민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농민 사망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허 청장은 “(이번 사건이)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지만 연말까지 예산안처리를 해야 하는 급박한 정치일정을 고려해 국정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허 청장은 전날 밤만 해도 “사퇴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당이 “허 청장이 사퇴해야 예산안 처리에 협조하겠다”는 민노당을 끌어 들이기 위해 허 청장에게 “탄핵도 불사할 것”이라는 압박을 가하며 사퇴를 종용한 것이다.

    경찰청장의 사퇴 문제를 놓고 ‘공권력이 법 질서 유지를 위해 폭력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난 일이므로 경찰청장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라는 입장과 ‘아무리 폭력시위라 할지라도 공권력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도를 넘어선 만큼 청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었다. 

    대통령은 이런 미묘한 사안에 대해 국가 운영이란 큰 틀 속에서 입장을 정리해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내린 결론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마땅한 본분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경찰청장 임기제를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판단의 책임을 사건 당사자인 경찰청장에게 떠넘겼고 여당은 민노당을 끌어들여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경찰청장 사퇴를 밀어붙인 것이다. 이 결과 ‘수사기관 혹은 금융조사기관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라는 임기제의 취지는 훼손될 대로 훼손되고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이란 문제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은 것이다.

    허 청장에 앞서 이기묵 서울지방경찰청장도 같은 건으로 사표를 제출했으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선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경찰이 앞으로 또다시 쇠파이프를 휘두르거나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식의 폭력 시위와 맞닥뜨릴 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물어보나마나다. 이제 폭력 시위에 맞설 수 있고, 맞서야만 하는 사람은 대통령 혼자뿐인 셈이다. 정말 그럴 각오를 하고 경찰청장 사퇴란 결론을 유도했다면 더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