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30년을 한 세대로 치는 것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견 계층이 뚜렷하게 바뀌고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이 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처럼 ‘압축근대’를 겪은 경우엔 ‘한 세대’가 더 짧은 것이 보통이고, 우리나라는 그중에서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경우에 속한다. 심지어 나이가 열 살만 달라도 다른 세대로 칭해야 할 만큼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의 괴리가 있다는 실감에 놀란 경험을 흔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회변화가 그만큼 급격했다는 뜻이다.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의 지난 약 100 년의 세월을 ‘격동의 시대’라고 칭하는 데 대부분 동의하리라. 세계사적 흐름과 맞물려 한층 내적변화가 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70~80대의 한국인이라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돈과 6.25의 기억을 생생하게 공유하고 있고, 산업화 시대의 주역 50~60대의 한국인은 6.25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함께, 세계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급속도로 편입되면서 전통적 가치관의 파괴 및 산업사회적 변동의 당혹감을 경험했을 것이다. 한편 보릿고개를 넘어선 이후 10~20대를 보낸 40대는,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학생운동 재야운동 등, 민주화의 폭풍을 정면으로 겪은 세대다. 이렇게 세상은 변해왔고 모든 시대는 나름대로 격동기였다.

    하지만 격동기 중에서도 격동기가 있는 법. 19세기 말, 20세기 초 쇄국과 개화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가 바로 그렇다. 일반적인 격동기가 자국의 내적인 격변을 말한다면, ‘격동기 중의 격동기’란 그런 변화가 세계사적인 흐름과 맞물려 한층 복잡하고 혼돈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특별한 감회를 느끼는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와 그 100여년 후, 즉 20세기 말, 21세기 초의 현재 상황이 매우 흡사한 동시대적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본고장인 중원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거치며 쇠퇴한 세상의 보편가치 ‘중화(中華)’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나라였다. 주자학에 의거해 설명되는 우주만물의 원리와 질서, 그 모든 것들의 근원적 존재방식과 의미의 추구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문인 지식인들이 사회의 최고계층을 이룬 국가였던 것이다. ‘이기(理氣)논쟁’ 즉, 세상의 근본이 ‘이(理)’인가 ‘기(氣)’인가를 두고 진지하고도 고상한 논쟁이 벌어지고 그것은 실제 당파적 입장으로까지 연결되면서 그 중심세력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한층 극단화한다. 동시에 그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철저히 배척되었다.

    한편, 세계사적으로 19세기는 서세동점이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눈부신 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을 경험하며 서구사회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놀라운 변화를 거듭하였고, 그 속에서 대다수의 서유럽국가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근대국가를 달성하며 국가이기주의적 생존방식에 열중하고 있었다. 식민지 쟁탈이란 이들 선진 근대국가들이 국력의 바탕이 되는 국부의 창출을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노력의 대표적인 행위다.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양산된 상품들의 시장 그리고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조달처라는 절호의 찬스, 국부의 최대 창출원이 바로 식민지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란 서구자본주의의 태생적인 본질과 모순이 그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악마적 이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시대에,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거해 스스로를 ‘화(華· 중심 및 보편)’ 그에 배치되는 것은 모두 ‘만(蠻· 오랑캐)’라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는 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실학파라든가, 연암 박지원처럼 청나라를 드나들며 서구의 근대적 산물에 접하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지식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끝내 제도권 안에서 활약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500년을 지탱한 왕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으로 전 국토와 백성이 참화를 입고도 300년을 더 버틴 나라는 드문 것으로 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하던 조선은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정교하게 질서화된 공동체였고, 그 저력으로 생산력 저하와 사회적 계층구조의 모순 등이 두드러지는 조선후기에도 기존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공고히 지켜냈다. 그것은 19세기 말의 세계정세 속에서 자연스럽게 ‘쇄국’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상도 신념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19세기적 ‘세계화’,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것은 도도한 역사의 대세였다. 이 대세에 끝내 저항하려고 했던 우리나라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지난 근현대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맥락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생존방식을 우리끼리 우리의 의사로만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국토분단이 20세기 세계정세 속에서 벌어진 일이니만큼 통일 역시 우리의 의사와 힘만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미국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상황에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놓인 강대국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 한편 그 흐름을 현명하게 파악하고 활용하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 당국의 눈치를 보며 노골적으로 반미(反美) 반일(反日)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태도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2005년을 보내고 2006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순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우리 사회 최고 지성이라 할 만한 대학교수님들이 순진한 민족자결주의 내지 80년대 학생운동의 현실인식을 내세워 물의를 일으킨 사건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맥아더동상 철거논쟁’을 비롯해서 “6.25는 민족통일을 위한 해방전쟁” “김일성은 위대한 근대적 지도자” 같은 얘기가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최고 지식인들 입에서 나온다니 대단히 딱한 노릇이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고들 계신 건지. 그에 대한 논리적 반론을 새삼 여기서 전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80년대 초중반 대학교 3학년(그것도 군대 가기 전) 정도의 발상이나 역사인식에서 졸업하십사 충언하고 싶다. 물론 그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국가 건설기 및 산업화 시대의 필요악이라 할 만한 반공교육 하에서 키워진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참신한 시각, 스스로를 돌아보는 인식의 전환을 위해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제발 이젠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사회 지도층 인사가 그런 ‘21세기형 쇄국주의’를 말한다면, 그건 한 때의 천편일률적 ‘반공교육’보다 훨씬 폐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