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에 이 신문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신참 기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먼발치에서 책이나 소문을 통해 학문 도덕 인간적으로 흠모해 마지않던 인사들을 직접 겪어 보면 소문과 실체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처음에는 당혹스럽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허탈감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끼게 된다.

    요즘 참여정부에서 한자리씩 하고 있는 교수 작가 등 지식인과 이른바 ‘통일 민중 양심 개혁 진보’ 세력의 명망가 중에도 그런 이가 적지 않다. 이 방면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 인사들의 이중 잣대와 세속적 욕망 추구, 엘리트 민중 사회학자의 몇 정권을 넘나드는 자리 욕심,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 공부시킨 반미통일운동가, 후학들에게 밥한끼 살 줄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좌파의 스승, 50억원대 부동산 투기를 하고서도 민권변호사로 대접받아 온 원로, 검약과 절제를 내세우지만 귀족적 삶을 살아가는 민중 속의 성직자, ‘구악(舊惡)’ 소리를 들었으나 언론개혁운동에 나서고 있는 전직 언론인 등.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못 본 척 문제 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진보는 선(善), 보수는 악(惡)이라는 이분법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서구 지성사에서 보수는 안정 자유 성장 경쟁에 무게를 두고, 진보는 변화 평등 분배 협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세력으로 차이를 구분한다. 또 보수가 개인적 성취와 이익의 극대화에 역점을 두는 반면 진보는 연대와 나눔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얼마 전 국회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박시환 변호사가 개업 후 22개월간 19억 원대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얘기가 나왔다. 평소 법조계의 전관예우에 대해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으나 그의 진보적 성향에 비추어 액수가 과(過)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당 의원의 추궁에 “솔직히 저도 세속적인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앞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강만길 위원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월 15일자 관보에 따르면 강 위원장은 부인과 장남 소유를 합쳐 재산이 32억여 원으로 기재돼 있다. 또 부인 명의로 5개 시중은행에 10억661만여 원이 예치돼 있는 것을 포함해 가족의 예금이 총 18억6587만 원에 이른다.

    물론 진보계열 인사라고 모두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를 아는 한 역사학자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빈민 계층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평소 청빈한 분으로 알려졌기에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위 인사들의 재산 형성 과정을 철두철미하게 따지곤 했던 시민단체들도 그의 재산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서민들은 이런 얘기를 듣게 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에게 “아저씨 노후 대비 많이 하셨어요? 운전 그만두시게 되면 매달 얼마나 버실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저희는 운전 그만두면 당장 굶어죽지요. 그러니 몸이 아파도 죽기 살기로 일하러 나오는 것 아닙니까”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강 위원장이나 박 대법관은 오랫동안 교수와 법관으로 재직해 왔고, 학문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분들이어서 강연 저술과 성실한 변론활동 등을 통해 ‘맑은 재산(청부·淸富)’을 일궜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두 분의 고고한 언행과 처신에 비추어 내심 그분들의 ‘맑은 가난(청빈·淸貧)’을 기대했던 이들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이 나라에 ‘진보주의자’는 많으나 ‘진보생활자’는 아직은 역시 드문가 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조영래 변호사와 제정구 의원이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