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연말이나 6·25가 되면 후방에 있는 기업체나 민간 단체들이 정성어린 자그마한 위문품을 가지고 일선장병들을 위문하는 것은 관례화 되어있었다.

    1982년 6월, 내가 이사장으로 근무하던 한국화재보험협회 임직원 대표단이 서부전선 애기봉(愛妓峰) 일대에 주둔한 해병사단을 방문했다. 나를 포함한 일행은 위문품을 전달하고 애기봉에 올라갔다. 안내장교가 일선상황을 설명한 후, 애기봉에 얽힌 병자호란 때의 애절한 여인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그 여인이 걸어온 길을 설명하는 해병장교의 말을따라 북으로 눈길을 돌리니 개성을 지나 그 북쪽에 있는 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 백 리쯤 떨어져 있는 산들은 어느 것이 천마산이고 어느것이 재석산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해발 750미터의 제석산(帝釋山) 정상에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변신한 33체의 하나인 제석상(帝釋像)이 여러개 서 있다. 그 옛날 고려왕조 시절, 송도에서 고관대작의 아낙네들이 치성을 드리기 위해 연중 이곳을 많이 찾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연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북으로 내려갔다가 제석산 기슭을 스치면서 서북쪽으로 흘러 예성강에 합류한다. 이 합류지점 부근에 금천(金川) 군청 소재지 인금천읍이 있다. 그곳에 있는 인민학교는 나에게 엄청난 마음의 충격을 주고 나의 인생항로를 바꿔놓은 곳이다.

     

    ◆ 北으로 넘어가 인민학교에 취직하다

    나는 8·15 해방 후 서울에서 신문배달과 막일을 하며 고학을 하다가 두가지 병에 걸렸었다. 우리학교 선생님 한분이 서울대학교부속병원 외과의사를 겸직하고 계셨으며, 그 선생님이 무료로 외과수술을 해주셔서 한가지 병은 고쳤다. 그러나 건성늑막염은 절대안정과 요양이 필요하다고 하여, 부득이 북위 38도선 이북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평양에 숙식까지 무료로 제공해주며 등록금 없이 공부시켜 주는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새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는 38선이 남에서 넘어오는 학생들은 무조건 받아들이며 환영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고향에 가서 몇개월 요양을 하고 평양에 있는 대학에 가기로 했다.

    나의 꿈은 의사가 되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봐주며 일생을 보람있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해서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고, 학비가 안드는 관비(官費) 학교를 찾아다니면서 공부해야 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이번에 무료로 공부시켜주는 의과대학이 평양에 생겼으니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것이다.

    고향에서 하루 세끼 제대로 잡곡밥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충분하게 휴식을 취했다. 그러자 4개월쯤 후에는 체중도 회복되고 웬만한 직장에서는 일을 할 수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이때가 되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양에 있는 대학에 간다 해도 돈 한푼 없이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정도의 용돈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 6개월만 근무할 예정으로 금천금교(金川金郊) 인민학교 선생으로 취직했다.

    나는 인민학교 5학년 담임이 되었다. 그 무렵 인민학교에는 교원인력이 많이 부족하여 각군(郡)에 교원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육기간 3개월의 1개학급을 편성했고, 교실로는 옛날 건물인 향교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이 학급의 담임과 수학선생 자리를 맡아 인민학교와 교원양성소 양쪽을 겸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인민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면서 자취생활을 했다. 여학생들이 가끔 찾아와서 밥을 지어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일반과목을 가르칠때와 운동장에서 함께 운동경기를 할 때, 가정방문을 할 때는 참으로 즐거웠다. 그렇지만 날조된 정치선전을 가르치라고 하거나, 기타 정치적 억압이 있을때는 괴로웠다.

     

    ◆ 인민위원회 "이승만과 김구를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라"

    서울에서 북한으로 올 때 북한의 억압정치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의가 진행중이었고, 국제여론도 남북통일 실현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몇 년 안에 남북총선거가 실시되어 한반도에 통일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서울에 있는 대학생이나 평양에 있는 대학생의 신분에 차이가 있을수 없다. 그날이 올때까지 몸조심, 입조심하며 모든것을 꾹 참고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컸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의학 공부 준비나 하라고 젊은이를 방치해 두는 세상이 아니었다. 민청회의니 독보회니, 생활검토회니 하면서 괴롭혔다. 남한의 자유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1947년 6월 15일경, 금천군 인민위원회 교육국장으로부터 김구와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교육을 각급 학생들에게 시키라는 지령이 교장을 통해 하달 되었다. 김구는 중국에 있을 당시 조선의 광산권을 중국 정부에 팔아 먹었고, 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때 조선의 철도권을 미국 정부에 팔아 먹었으며, 자신들은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해외에서 살찐놈들이니 민족반역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인민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는 지령대로 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교원양성소 학생들에게도 똑같은 교육을 실시했다. 머리가 다 큰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나의 성실성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거짓말 교육을 하려니 낯이 뜨거운 심정이 들어 다음과 같은 사족을 덧붙였다. “ 그러나 김구나 이승만이는 독립운동을 열렬히 전개한 바도 없지는 않다.”입 다물고 꾹 참으며 있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실수를 한 것이다.

    나의 담임 5학년 학생 중, 열다섯살 된 남자애가 있었다. 제석 산밑의 새리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늦게야 학교에 입학한 아이였다. 6월 28일 토요일 늦게 그 아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나를 찾아왔다. 그 아이의 귀띔에 의하면, 열성 공산당원인 최상권(崔相權) 선생이 민족 반역행동에 대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제 그 애가 최선생에게 비밀리에 불려가서 나에 대한 여러가지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김구, 이승만 규탄교육 내용을 상세히 묻고, 교실 게시판에 어떤 그림을 많이 붙이냐는 등을 체크하면서 메모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겁에 질려 불안해하는 그 아이를 잘 타일러 안심시킨 후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 공산당 열성당원인 나의 벗 최상권 선생

    최상권 선생은 이번에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며, 한동안 가까운 친구였다. 내가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 아침에는 구멍가게에 가서 두부 만들 때 나오는 찌꺼기 비지 한 덩어리를 사다가 간장을 쳐서 데워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은 물을 많이 부은 멀건 수제비국을 끓여 물로 배를 채웠다. 밤 12시에는 보신각 부근에 있는 동아일보사에 가서 신문을 받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돌리고, 일요일에는 막노동판을 찾아다니던 시절의 일들도 최상권 선생은 모두 알고 있었다.

    8·15 해방 직후 나를 아주 좋아하며 따르는 여고생이 있었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며, 머리가 좋은 문학소녀 였다. 나도 그 여고생을 좋아해서 둘은 깊은 플라토닉 러브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내가 리어카에 소금가마를 잔뜩 싣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삼각지 전차역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그 여고생이 내 비참한 꼴을 보았다. 그후부터는 그 여고생이 나를 멀리했고, 나도 그런 일로 변심하는 여자는 필요없다고 여겨 잊어버렸다. 최상권 선생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격려까지 해준 일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절친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는 공산당 열성당원으로서 친구를 배신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친구들은 뒤에서 그를 미워하면서도 앞에서는 눈치를 살피며 입조심들을 했다. 그가 이제 내 뒤를 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열성공산당원이고 나는 당원이 아니다. 칼자루는 그쪽이 쥐고 있으니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권력을 쥔자에 의해 반동분자나 민족반역자로 몰리게 되면 학교 교원이건, 농민이건, 노동자이건,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가혹한 처벌을 받는것이 북조선의 당시 실정이었다. 속에있는 말 한마디 잘못 뱉다가는 체포되고 마는것이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38선 이남으로 도망을 칠까? 자유를 누린다면 시중에서 막노동을 한들 어떠랴. 깊은 갱도에 들어가서 광부가 된들 또 어떠랴. 남으로 가고자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실낱같은 미련이 내 뒤를 잡았다. 최상권의 목을 쥐고 있는 군 교육국장 이응돈(李應敦)이 있다. 그는 금천군 최고 엘리트 공산당원 3인방 중의 한 사람이며, 모든 교원들이 두려워 하는 존재였다.

    나는 이응돈 국장의 열성당원 행위를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옛날 깊이 맺은 친분관계가 있었다. 그 역시 나를 좋아하고 신임했다. 교원 양성소 학생 담임을 맡긴 것도 그의 배려였다. 그를 만나 잘 이야기해서 나의 과실을 사과하고 이해시키면, 최상권을 주눅들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올 때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응돈 국장이 어떻게 나올지도 역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가지 방안을 비교분석해 가며 가장 좋은것이 무엇인가를 궁리하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밤은 자정을 넘어 6월 29일의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아무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좀더 심사숙고한 후에 최후 결심을 하기로 하고 날이 훤히 밝은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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