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적자 해소" 외친 트럼프, 제약 뺀 채 EU에 관세폭탄무역수지상으로만 '적자'…무역전쟁 명분 약해져회원국에 글로벌 제약사 본사·지사 유치해 재미보는 EU도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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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출처=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대한 50% 고율 관세 부과를 7월 9일까지 한 달여 연기하면서 미국과 EU의 무역 긴장은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EU 때리기'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 정작 무역수지 적자의 핵심인 제약산업은 협상 테이블에서 제외한 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25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연기) 결정을 내렸다"고 밝히며 "위원장을 빠르게 만나 해결책을 찾아볼 것"이라고 밝혔다.WSJ는 트럼프 대통령의 50% 관세 위협이 과거와 비교해 훨씬 높은 수위이며 7월9일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대규모 무역 전쟁이 우려된다고 전했다.미국과 EU는 앞으로의 통상 협상에서 디지털서비스세(DST) 폐지, 농산물 수출 기준 변경 등 일부 사안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그러나 정작 대EU 무역 적자의 핵심으로 꼽히는 제약 부문은 협상 테이블에서 빠져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공세가 정책적 일관성을 결여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
- ▲ 2024년 미국이 유럽연합(EU)으로부터 수입한 품목 순위(금액순). 출처=로이터통신 갈무리ⓒ로이터통신
다만 이러한 접근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제약산업의 구조적 특성상, 미국과 EU 간 실질적인 경제 이익 흐름과 무역통계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미국의 대EU 무역 적자는 지난해 기준 2360억 달러에 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적자가 부가가치세(VAT), 디지털서비스세(DST), 각종 비관세 장벽 등 EU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적자의 핵심 원인이 제약산업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미국 외교협회(CFR)에 따르면, 대EU 무역적자의 약 3분의 2는 제약 부문에서 발생한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역외 생산 확대와 세제 회피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제약 분야의 무역적자는 전체 적자 확대의 주요 원인이 되어 왔다.실제로 지난해 미국은 EU로부터 1130억 달러어치의 의약품을 수입했다. 이는 EU 전체 수출의 20.6%에 해당하며, 단일 품목 중 가장 높은 비중이다. 이 중 일부는 유럽 대형 제약사의 제품이지만, 상당수는 미국 제약사들이 조세 회피를 위해 아일랜드 등 저세율 국가에 세운 자회사를 통해 역수입한 제품이다.예컨대, 미국 제약사들이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나 벨기에 등에 자회사를 설립해 의약품을 생산한 뒤 이를 미국 본사에 판매할 경우, 이 거래는 무역통계상 'EU에서 미국으로의 수입'으로 잡힌다. 기업 내부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통계상 무역적자로 계상되는 구조다.결과적으로 제약 부문에서의 무역 적자는 통계상의 착시일 뿐이며, 미국 기업들이 실질적으로는 이익을 보고 있는 구조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제약 문제를 두고 EU를 상대로 본격적인 무역 압박에 나서기는 정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명분이 약하다.게다가 세제라는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려 해도, 미국 내 대대적인 세제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한 실질적 개선은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행처럼 미국 제약사들이 저세율 유럽 자회사에서 생산한 의약품을 미국으로 역수출하는 구조를 바꾸려면, 해외 자회사 소득에 대한 세율을 인상해야 한다. 현재 미국은 해외 자회사에 최저세율인 10.5%만을 적용하고 있다.이 세율을 높이면 기업들이 조세 회피 목적의 역외 생산을 줄일 가능성이 커지고, 그에 따라 무역 통계상 적자도 줄어들 수 있다. -
-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출처=로이터ⓒ연합뉴스
제약산업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건 EU 역시 마찬가지다. 화이자, 존슨앤존슨, 사노피, 노바티스 등 글로벌 제약사의 본사나 생산기지가 여러 EU 회원국에 걸쳐 분산돼 있고, 이들 다국적 기업은 세제 혜택을 통해 비용을 최소화하며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EU 회원국들도 자국 내 유치한 제약사를 통해 무역수지 개선, 고용 창출, 세수 확보라는 경제적 실익을 누리고 있어, 이 구조를 흔드는 데에 극도로 신중할 수밖에 없다.아일랜드를 비롯해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은 법인세가 낮고 지식재산(IP) 이전에 따른 세금 공제가 커, 제약사들의 유럽 내 생산·조세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예컨대 아일랜드는 12.5%라는 낮은 법인세율과 영어 사용 환경 덕에 미국 제약사의 유럽 허브 역할을 맡고 있다. 벨기에는 '특허 박스(Patent Box)' 제도를 통해 특허 수익의 85%를 공제해, 실효세율을 5.1%까지 낮추는 세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이런 구조 아래에서 제약 산업을 무역 협상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회원국 간 산업 유치 경쟁과 세제 충돌이 현실화될 수 있다. 산업구조 균형과 정치적 합의가 깨질 수 있는 만큼 제 아무리 미국의 요구라고 협상 과정에서 EU의 집단 반발이 커질 수 있다.결국 미국과 EU 겉으로는 강경하게 대치하면서도, 속으로는 각자의 실리를 지키기 위해 '암묵적인 금기'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