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타도 외치더니 독재자 됐네 … 5.18 비판 처벌법이나 만들고

이종권 전 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제자들에게 보내는 연작 서신을 연재한다. 70년대 80년대 강단에 섰던 대다수 교수들이 기본적으로 겪었던 학생들과의 갈등과 고민을 다루고 있다. 

학생들, 특히 이른바《민주화 운동권》학생들은 자신들의 투쟁에 교수들의 동참을 끊임 없이 요구했다. 그들에 동조한 교수들은 1987년 6월 26일 가두시위가 격화되던 와중에《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결성해 운동권과 보조를 맞췄다. 이런 움직임에 가담하지 않는 교수들은 이른바《어용교수》라 불리며 따돌림과 박해를 받았다. 

민교협 이 생기기 전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념·철학과 다른 노선을 가진 교수들을《어용교수》라며 수강거부를 하거나, 심지어 교수연구실에 팻말을 달고 못을 박아 폐쇄하는 만행과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교수들이 이런 봉변을 당했다. 학생들과의 이런 갈등은 특히 인문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겐  모두가 겪어야 할 홍역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이 연재는 희수(喜壽)에 달한 필자가 그런 시련 속에 제자들과 가졌던 치열한 논쟁을 회고하며 쓰는 마지막 강의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의 탄생·성장·발전·미래에 대한 중요한 의제(아젠다)가 담겨 있다. 2030 청년들에게도 좋은 논점과 관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권 교수는 서울공대 항공학과 졸업후 다시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가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중앙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했다. 대표적 저-역서로는《과학문명사》《수리철학》《현대철학의 쟁점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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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나의 편지에 대한 자네의 반박 글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나 그 글은 지금까지 내가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온 것과 많이 차이가 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고 생각되어 다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른바《6월 항쟁》직후 교육부의 지시로 자네를 비롯해 당시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해 1학기 성적을 취소하고 수업료를 반환하도록 한 조치에 자네가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로 자네가 위선자라거나 전리품을 챙겼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비 한 마리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듯이, 하나의 잘못만으로 사람을 부도덕한 존재로 만들 수는 없다. 

내가 운동권의 전리품이라고 한 것은 물론 자네의 현직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자네의 말처럼 자네를 비롯하여 주위에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헌신하고도 아무 전리품도 챙기지 못하고 지금도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번 저지른 부도덕한 행동을 가지고 그 사람의 도덕성을 규정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네가 지적한 주위 사람들의 정직한 삶 만으로 운동권의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네를 비롯하여 주위에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 말고, 운동권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내걸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말도 안 되는 특혜를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나는 운동권을 타락하고 위선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 이다.

6월 항쟁 직후 자네를 비롯한 운동권이 그들이 목표로 한 민주화가 달성된 것에 만족하고 학생 운동의 결과로 받게 된 1학기 나쁜 성적과 등록금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자신들의 희생으로 기꺼이 감당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운동권이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는 데 만족하고 그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보상금이 얼마나 되었건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쳤다면 매우 아름다웠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정당한 보상금이 얼마가 되어야 마땅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운동권의 진정성은 의심을 받고 보상금은 전리품으로 전락하게 된 것 이다.

운동권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주장하고 또한 자신들의 투쟁을 미화 하려 노력해 왔다. 

그 중에 예외적인 인사가 얼마 전 타계한 장기표 씨이다. 

현실에 대한 장기표 씨의 인식은 비록 나와는 달랐지만, 그의 양심과 용기에 대해서는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 왔으며 박정희의 체제가 장기표 씨가 제기한 반대 정도는 싫더라도 관용할 수 있는 정도의 독재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유감스러운 일은 장 씨가 운동권에서마저도 배제되고 홀대를 받은 것 인데, 나에게는 그 사실이 운동권의 물은 장 씨처럼 깨끗한 인물이 놀기에는 너무 더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으로 생각되었다.

운동권들은 권력을 잡자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의 성격을 우습게도 법률로 규정 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법률의 타당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까지 불법화하는 법 을 만들었다. 

자네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헌신한다면 누구의 말처럼,

따라서 나는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임을 부정하는 언동을 금하는 법이 폐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할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부터 운동권보다는 박정희가 압도적으로 훌륭하다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나의 견해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판을 환영하는 편이다. 

인간은 얼마간 모자란 존재이므로 나의 견해에도 오류가 있을지 모르며, 있을 경우 외부의 냉정한 비판이 아니고서는 잘못을 깨우치기가 좀처럼 어렵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를 찬양하는 견해를 표명했을 경우, 내가 접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내가 용감하다는 반응 이었다.

누가 말한 것처럼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독재의 틀과 관행은 주로 운동권의 노력으로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 하고 박정희를 찬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분위기 를 만든 것 또한 운동권이었다. 

규모는 어떻든 간에 또 다른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 아니라고 주장하다가는 처벌을 받게 되며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박정희 만세를 부를 수 없게 만든 것 이다.

이 때문에 운동권이 군부 독재 타도를 외쳤을 때 진정으로 원한 것이 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독재자들이 휘두른 독재적 권력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는 것 이다. 

40년 가까이 되도록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지부진한 최대의 원인이 실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독재를 타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는 독재를 타도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하는, 

어떤 의미에서 독재 타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내건 근대화라는 목표에 자신의 영혼을 바친 박정희 정도는 아니더라도 얼마간 진정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자네를 비롯한 운동권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