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연구소·골드만삭스 등 올해 러시아 경상수지 흑자 2000억~2400억 달러 이상 전망서방 제재, 러 지도부·국영기업 자산동결·거래금지 등 금융제재 위주…에너지 수출은 여전2월 우크라 전쟁 후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입…EU 356억 달러, 인도 1600만 배럴
  • ▲ 대국민 연설을 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국민 연설을 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올해 1분기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뒤 미국을 필두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이 시행한 대러 경제제재가 효과를 못 본 셈이다. 국제금융계는 서방 진영이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출을 금지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 지적한다.

    푸틴 “올해 1분기 경상수지 흑자 580억 달러 이상…사상 최고치”

    푸틴 대통령은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국영방송을 통한 대국민 연설에서 “올해 1분기 경상수지 흑자는 미화 580억 달러(약 71조6200억원) 이상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2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1조4830억 달러(약 1831조3500억원)인 러시아에게는 매우 큰 금액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서방측의 대러 경제제재가 오히려 서방국가들의 인플레이션, 실업률 증가, 미국의 경제 역동성 악화, 유럽의 생활수준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며 “대러 경제제재는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전쟁 후 물가상승에 대해서는 푸틴 대통령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후 소비자 물가는 9.4% 상승했고, 이 추세로 볼 때 연간 17.5%의 소비자 물가 상승이 예상된다”며 “올해 얻을 경상수지 흑자를 가계 지원에 이용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국제금융계 “올해 러시아 경상수지 흑자 2400억 달러 이를 수도”

    서방 진영의 대러 경제제재가 먹혔다면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가 대폭 감소하는 게 상식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러 경제제재로 인해 석유·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러시아의 경상수지가 대폭 증가했다는 게 국제금융계의 지적이다.

    국제금융연구소(IIF)는 지난 3일 “러시아의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최고 2400억 달러(약 296조4200억원)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러시아가 사상 최고의 경상수지 흑자를 낸 지난해의 기록1200억 달러(약 148조2200억원)의 두 배다.

    IIF 수석 이코노미스트 로빈 브룩스는 국제유가 상승세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브룩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원유가격 상승이라는 러시아 경상수지 흑자 요인은 여전히 견고하다”며 “대러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다량의 외환이 러시아로 계속 유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미국 서부텍사스산 중질유(WTI) 가격을 올해 1분기 33% 올랐다. 블룸버그는 이런 국제유가 상승 덕분에 러시아의 올해 에너지 수출액이 3210억 달러(약 396조63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 ▲ 지난 3월 20일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는 덴마크 코펜하겐항에 입항하려는 러시아 유조선을 막아서고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산 석유 대금이 우크라이나 침략에 쓰인다고 '그린피스' 측은 주장했다. ⓒ그린피스 공개사진.
    ▲ 지난 3월 20일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는 덴마크 코펜하겐항에 입항하려는 러시아 유조선을 막아서고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산 석유 대금이 우크라이나 침략에 쓰인다고 '그린피스' 측은 주장했다. ⓒ그린피스 공개사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골드만삭스는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로 내수가 급감하면서 수입이 줄어들게 될 것이므로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면서 올해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가 2050억 달러(약 253조1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대러 경제제재 영향…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로 덮으려는 듯

    한편 한때 가치가 폭락했던 러시아 루블화는 지난 2월 초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블화 가치는 미국이 대러 경제제재를 발표한 직후 1달러당 121.5루블까지 떨어졌었다. 당시 대러 경제제재가 효과를 본다고 생각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루블(Ruble)’이 ‘루블(Rubble·돌무더기, 쓸모없는 것)’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지난 7일 “오늘 러시아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루블 환율은 75.75루블로 마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며 “급락했던 루블화 가치가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덕분에 반등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는 “에너지 수출이 러시아 루블화 가치를 떠받치고 있는 한 러시아 정부와 실로비키(푸틴계 권력형 재벌)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와 서방기업들의 탈러시아 행보가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루블화 가치 회복은 푸틴 대통령에게 큰 승리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러, 가격 상승한 에너지 수출로 경제 지탱…석유·천연가스 수출 놔둔 탓

    블룸버그는 러시아의 올해 GDP 성장률 전망치를 –9.6%로 잡았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원자재 가격이 폭락했던 2009년보다 더 안 좋은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역대 최고치의 경상수지 흑자로 막으려 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전략이 먹힐 수 있는 이유는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출 제재가 요원하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방진영의 대러 경제제재는 푸틴 대통령과 그 가족, 정치인과 군인, 실로비키 등 측근들에 대한 자산동결·거래금지·여행금지, 러시아 국영은행 및 에너지 기업에 대한 외환거래 금지 같은 금융제재 위주다. 러시아산 석탄 수입금지가 추가됐지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여전히 EU와 아시아 등에 수출 중인 러시아는 꿈쩍도 않고 있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지난 3월 20일 덴마크에서는 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가 코펜하겐 항에 입항하려는 러시아 유조선을 막아서고 시위를 벌였다. ‘그린피스’ 측은 “유럽이 사들인 러시아산 석유 대금은 우크라이나 침략에 사용된다”며 EU 회원국을 향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중단을 촉구했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EU 회원국이 러시아에서 수입한 석유·천연가스 대금은 356억 달러(약 44조200억원) 가량이었다. 러시아는 또한 EU 회원국들의 거부감을 덜기 위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나온 석유와 러시아산 석유를 섞어서 판매하고 있다고 ‘그린피스’는 지적했다.

    러시아는 또 서방 금융제재에 맞서 에너지를 헐값에 팔고 있다. 인도가 그 덕을 많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에 따르면, 인도는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 후 지금까지 러시아산 석유 1300만 배럴을 수입했다. 인도가 지난해 러시아에서 수입한 석유는 1600만 배럴이었다.

    이런 제재의 빈틈을 막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입을 금지하자는 협의는 이미 3월 초순부터 시작됐다. 4월 초순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일어난 민간인 집단학살이 확인된 뒤부터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하지만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 수입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헝가리나 불가리아 같은 EU 회원국들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독일은 “올해 안에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할 수 있다”며 변죽만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