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행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재판기록·진술조서 등 사료 토대로 역사추적"반일사관 유지하기 위해 일부서 미화, 과장"… 교과서 영웅들의 '흑역사' 작심 폭로
  • "장군은 우리 민족 모두의 영웅이며, 자부심입니다."

    지난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洪範圖)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은 '독립전쟁 첫 승리' 봉오동 전투와, '독립전쟁 최대의 승리',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전쟁의 영웅"이라며 "장군의 불굴의 무장투쟁이 강한 국방력의 뿌리가 됐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장군이 고향 흙에 흘린 눈물이 대한민국을 더 강하고 뜨거운 나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의 주역으로 알려진 홍 장군의 유해가 돌아온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국내 주요 언론은 연일 이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한 대통령의 발 빠른 행보와 장군의 공적을 재조명하기 바빴다.

    그러나 당시 재판기록 등 일본의 사료와 우리 측 사료를 교차 검증한 사학자들은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한 반민족행위자"라며 그런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가당치도 않다는 반론을 폈다.

    홍 장군의 유해 송환 즈음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전공)는 "홍범도가 무장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1921년 이후 그의 행적은 논란투성이"라며 "1921년 6월 28일 소련 볼셰비키 정부가 자유시에서 항일 무장독립군을 궤멸할 때 홍범도는 소련군의 편에서 이 학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 장군은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 적군(Red Army)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

    강 교수는 "홍범도는 이런 협력의 대가로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았다"며 "그는 대한민국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소련 공산당 당원이자 소련군 대위로서 공적 생활을 마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민족주의·반일사관에 홍범도 '어두운 면' 묻혀"

    사실 강 교수처럼 교과서와 평전에 기술된 홍 장군의 업적이 지나치게 부풀려졌고 오히려 미화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 한국학센터 명예교수나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 등 다수 전문가들은 각종 신문 기고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항일무장투쟁 영웅'의 실체와 조작된 역사의 이면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반일사관을 앞세운 위정자들과 주류 사학자들이 '홍범도 띄우기'에 나서면서 '영웅 홍범도'의 부정적인 면모들은 대거 생략되거나, 표면 아래로 묻혔다. 특히 홍 장군의 최대 공적으로 알려진 '봉오동 전투' 기록도 집권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가공됐다는 게 주류 역사학계에 반기를 든 '반골사가'들의 주장이다.

    일본 측 '봉오동전투상보'와 경부 와쿠이가 조사한 '복명서', 조선군사령관이 육군성 앞으로 보낸 전보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사망자는 1명이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이 이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사망자 숫자가 150명대까지 늘어났다.

    신간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도서출판 양문 刊)'에서 저자 진명행은 "일본 측 자료라 못 믿겠다느니 일본 측에서 축소보고했다느니 하면서 '행복 회로'를 돌리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위의 전투 상보를 보면 일본군 추격대는 남양수비대 27명, 증파된 월강추격대 243명을 모두 합쳐 대략 270명 정도 규모였다"며 "만약 157명을 사살하고 20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면 독립군은 유령부대와 싸우기라고 했다는 말이냐"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기술들은 일본의 사료를 교차 검증하지 않고, 우리 측 사료인 독립신문과 임정 군무부의 자료를 맹신해 생긴 오류"라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 연합 작전에서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홍범도는 '편장'이었는데,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를 보면 홍범도가 작전 지도를 펼치고 마치 모든 것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진동이 주목받지 못하고 홍범도가 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기록된 이유는 최진동이 중일전쟁 이후 변절해 친일 부역한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의 역할이 축소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소위 '반일사관'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 행적이 명확한 최진동을 버리고 홍범도를 '신출귀몰의 명장'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김좌진 일파 '수탈'에… 양민들 '마왕'이라며 두려워해"

    정설로 굳어진 역사를 상대로 '팩트체킹'이라는 메스를 들이댄 저자는 '홍범도 장군' 외에도 다수 영웅들이 무장 독립운동 투쟁의 빈약한 전과를 부풀리는 과정에서 미화됐다고 주장한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金佐鎭) 장군도 우리에게는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 그리 대단한 공적이 있던 사람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김좌진의 최대 공적으로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간의 의도적인 연합 작전도 아니고, 매복해 섬멸 타격한 작전도 아니며, 일본군에 커다란 피해를 준 적도 없는 허구의 소설"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청산리 전투'의 가장 큰 승리라고 알려진 '어랑촌 전투'의 사례를 보더라도 우리 측 기록에는 적 연대장을 포함해 300여명을 사상시킨 대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본군 하사관 1명과 병졸 2명이 전사했을 뿐"이라며 당시 일본군 사망자 3명을 매장하기 위해 '소자벌산촌'의 토지 구입비를 청구한 일본의 공문서를 근거로 내세운다.

    저자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김 장군의 이미지도 상당 부분 와전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1923년 3월 하얼빈총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1922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에 취임한 김좌진은 동녕 영안 밀산 지방에 숨어들어 조선인 농가에 흩어져 밥을 얻어먹었다"며 "당시 양민들의 민폐가 막심하므로 속히 이들을 구제해 정업(正業)의 길로 인도하게 조치를 취해 달라는 게 보고의 요지였다"고 소개한다.

    저자가 밝힌 1924년 3월 간도총영사 보고는 더욱 충격적이다. 당시 김 장군은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의 군령을 남발해 징집에 응하지 않거나 요구한 군자금 상납에 응하지 않는 양민들은 친일파 혹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단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

    저자는 "이런 방식이 북만주 조선인들의 민심을 크게 이반케 했고, 만주에선 김좌진을 '마왕'이라고 할 정도로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김좌진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빈주현 마을 사람들이 조직에서 탈퇴하려고 대회를 열자, 김좌진 일파 무장대원 25명이 대회장이 난입해 주민 6명을 격살한 일도 있다"고 덧붙인다.

    안중근 "이토가 '천황 뜻' 거역해 죽였다" 법정 진술

    저자는 도마 안중근(安重根) 의사 역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의 승리를 축하했고, 순국 직전까지 일본 천황을 경모하는 마음과 충의를 표했으며, 심문 기록을 보면 '을사조약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6권 안중근편'과 '안중근 8회 심문조서' 등을 인용한 저자는 "그는 신문과 재판 기간 내내 '이토가 천황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토를 죽였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러일전쟁 당시 천황의 선전조칙에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내용이 있음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안 의사의 '착각'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일본 천황이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자 전쟁을 한다는 얘기는 선전조칙 어디에도 없다는 것. 다만 만주를 러시아에게 뺏기면 한국의 보전을 지원해도 의미가 없다는 얘기만 있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처럼 안중근은 시국과 국제 정세를 읽는 시각이 어두웠고, 약간의 한학 교육을 받은 것 외에는 아무런 정치적 식견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1909년 12월 28일자 황성신문 등을 인용한 저자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있지도 않은 '안중근 모친의 편지'가 정부 기관에서조차 무차별 인용되고 있으나, 이 편지는 조작된 것이고 실재하지도 않다"며 "안중근의 모친이 수의를 전달했다는 미담도 각색된 거짓말"이라고 폭로한다.

    저자는 "안중근의 '마지막 유묵(遺墨)'에 대해서도 각종 미담이 윤색돼 돌아다닌다"며 "대표적 유묵으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당시 치바 토시치(千葉十七)라는 간수가 안중근의 강직함과 의연함에 감동해 글씨를 간청하자, 안중근이 이러한 글을 써주었다는 게 대중에 회자된 미담"이라고 소개했다.

    저자는 "하지만 안중근은 사형 집행 당일 이러한 유묵을 쓰지 않았다"며 "조선신문에 따르면 안중근의 마지막 유묵은 '인심유위 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미약하다는 뜻의 순자(荀子) 해폐편(解蔽篇)에 나오는 글귀"라고 밝혔다.

    저자는 "치바 토시치가 사형 집행 5분 전, 안 의사로부터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받았다는 미담은 오오바야시지(大林寺) 주지 사이토 타이켄(齊藤泰彦)의 저서 '내 마음의 안중근'에 나오는 이야기로, 상당 부분이 창작됐거나 각색된 내용이 많다"고 주장한다.

    "일방적 역사 해석 강요… 타인 향한 증오·폭력으로 변질"

    이처럼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영웅들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낸 저자는 "역사는 무엇이 사실인가를 구하는 학문인데, 어떤 목적성을 갖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사실은 늘 왜곡되거나 오도되기 마련"이라며 "일방적인 역사 해석 강요는 곧잘 타인을 향한 증오나 폭력의 양상을 띤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민족이나 국가 같은 전체의 논리가 개인을 압도하게 되면서 위안부 얘기만 나오면, 모든 언론이 벌떼같이 일어나 사람을 매장시켜버리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한 일이 됐다"며 "토론은 사라지고, 거대한 담론 아래 침묵을 강요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고 개탄한다.

    저자의 고민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언제부턴가 팩트보다 가치와 평가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우리 역사가 거짓으로 점철된 자화자찬의 '미화적 기술'에 너무 천착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그 문제의식의 근원으로 '난치의 종양'처럼 자리잡고 있는 민족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기존의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에 대해, 우리가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생략해왔던 사실들을 무대 위에 끄집어 올려놓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 저자 소개

    진명행: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유난과 극단을 싫어하는 자유주의자로, 역사에 흥미를 느껴 공부한 지 20년이 넘었다. 특히 고대사와 근현대사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고,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역사진흥원 객원연구위원 △한국정책거버넌스 자문위원 △청년웹진 'The Index' 논설위원 △'진명행의 역사저널' 운영자 △한일역사교류 포럼 추진위원 △'제3의길'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직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