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美에 "주한미군 철수, 핵 철거" 요구… 1990년 방북 추진, 1992년엔 대선 출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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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일 새벽 별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있다. ⓒ뉴시스
15일 새벽 별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1987년과 1992년 대통령선거에 이른바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주목받았다. 당시 재야운동권에서 이른바 'NL(민족해방파) 계열'은 김대중 당시 후보를 지지했고, 'PD(민중민주주의파) 계열'은 백기완 후보를 밀었다.1987년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두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중도사퇴했지만, 1992년 대선은 완주해 득표율 1%에 해당하는 23만8000여 표를 얻었다. 1992년 선거에서는 '재벌 해체와 기간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공약을 내걸었다.1988년 9월에는 미국을 방문해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백 소장은 워싱턴 주재 한국특파원들과 만나 '머빈 다이말리 하원의원에게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의 철거를 요구했다"고 밝혔다.1990년 8월에는 방북을 추진하기도 했다. 백 소장은 자진해서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고, 북한에서는 환영한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방북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방북 경로를 두고 북한과 대립한 것으로 전해진다.전직 국가정보원 고위간부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라고 요구했지만, 백 소장은 '내려올 때 뱃길로 내려왔으니 올라갈 때도 뱃길로 가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백 소장은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했다.대표적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백 소장의 미발표작이 원작으로 알려졌다.이 같은 이력으로 인해 좌파 진영에서는 백 소장을 '민족운동·통일운동의 어른”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우파 진영에서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라는 평판이 많다.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전 대통령)를 밀었던 당시 재야운동가들 사이에는 '민주진보진영 단일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백 소장에게 아쉬움을 드러내는 분위기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