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양승태 61차 공판…증인 "판사 블랙리스트 파일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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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이수진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진보성향 법관들의 외부 행사에 반대했다는 문건이 나왔다. 이수진 전 재판연구관은 ‘사법 농단’의 피해자로 유명하다. ‘판사 블랙리스트’도 실체가 부풀려 졌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증언도 나왔다.
- ▲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사진) 전 대법원장. ⓒ박성원 기자
대법원장의 진보적 판사 모임 와해공작 증거라는 문건 공개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 심리로 열린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62·12기)·고영한(65·11기)의 61차 공판에는 ‘3.25행사 중복가입 해소 조치 / 이탄희·이수진’이라는 문건이 제시됐다. 이 문건에는 ‘사법농단’ 피해자로 알려진 이수진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거론됐다. “이수진 전 재판연구관이 진보성향 법관들의 소모임이 추진하는 행사에 반대했다”는 내용이었다.
‘3.25행사’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이 2017년 3월25일 연세대와 공동으로 개최하려던 학술대회를 말한다. 인사모는 대법원 산하 전문분야연구회 중 하나로 진보 성향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산하 소모임이다.
이날 법정에 이규진 전 대법원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이 증인으로 섰다. 그는 2017년 3~4월 사이에 해당 문건을 작성했다. “당시 법원행정처 간부들 사이에서는 인사모와 연세대의 공동학술대회를 우려했다”고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밝혔다. 법원에 대한 비판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법관의 정치적 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검찰 측은 “이런 점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동학술대회를 저지하고, 인사모를 와해하려 했다(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고 보고 있다.
“이수진 전 재판연구관, 진보 판사들 외부 모임 부정적으로 평가”
당시 인사모 관계자들의 설득에는 이규진 전 상임위원이 나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건 10쪽에 이런 내용이 있다.
“2017년 당시 이수진 재판연구관이 ‘3월25일 회의는 나도 반대한다. 연구관들(진보 성향 판사들)이 너무 나가는 것 같다. 고 모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연구관 대부분은 연세대와의 공동 행사라든가 법관 인사, 대법원장의 인사 집중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상임위원은 변호인 측 질문에 잠깐 침묵하다 “(내가) 그렇게 기재한 것이 맞다”고 답했다. 변호인이 “이 대화를 (이 전 연구관과) 한날한시에 한 것인가, 아니면 여러 차례 걸쳐서 한 대화를 모아서 정리한 것인가”라고 묻자 머뭇거리며 그는 “한날에 한 대화는 아닌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전 상임위원은 “이 전 연구관과 대화한 내용을 증인이 정리했느냐”는 질문에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야 “(이 전 연구관과 관련해) 언론 보도가 제 말의 진위와 다르게 자꾸 나가 진술하기가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인사모와 관련해) 2015년 9월9일 이수진 전 연구관, 이 모 당시 인사모 회장을 설득하기 만났다”면서 “인사모가 추진한 공동학술대회에 대해 개인적인 우려를 전하며 이 전 연구관과 상의했는데, 이 전 연구관이 (학술대회를) 못 막을 것이라고 했고 특별히 자기 의견을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이 전 상임위원은 거듭 밝혔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을 주장하며 ‘판사 블랙리스트’를 폭로했던 이탄희 전 판사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컴퓨터에 든 판사 블랙리스트 파일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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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측은 "앞서 검찰이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받은 이탄희 전 판사에게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말했는가'라고 물었는데, 증인은 이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이 전 상임위원은 "(블랙리스트 파일이 있다고 말한) 그런 기억은 없는데 후배 법관이 제게 들었다고 하니 부인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이탄희 전 판사가 발령받은 그 정기인사 전에) 기획조정실의 컴퓨터를 본 적은 없다"고 했다.
- ▲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61차 공판이 지난 10일 진행됐다. ⓒ정상윤 기자
이에 “(증인은 블랙리스트 파일이 있다는 컴퓨터를 보지 않았다는데) 그렇다면 이탄희 전 판사가 말한 그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변호인은 지적했다. 이 전 상임위원은 “그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제가 비슷한 말을 했다면 2017년 1월 무렵에 작성한, 공동학술대회 문건이 (이탄희 판사가 말한) 그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증언대로면 ‘판사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가 의심을 받게 된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저질렀다는 사법농단 사건의 성격을 바꿀 수도 있는 증언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법관들의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 예산 문제와 예규 때문”
법관들이 여러 연구회에 중복해서 가입하는 것을 양승태 대법원장이 막았다는 문제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검찰 공소사실에는 “법원 행정처가 진보 성향 법관들의 공동학술대회 개최를 저지하고 인사모를 와해하기 위해 법관들이 연구회에 중복으로 가입하지 못하게 하려 시도했다”고 명시했다.
변호인 측은 “2017년도 전문분야 연구회 예산이 2배 증액됐고, 국회 결산감사 등에서 (연구회 지원 등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서 “또 연구회 중복가입을 금지하는 예규가 있음에도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이 전 상임위원에게 물었다. 그는 “그렇다”며 “하지만 (인사모가 추진하던) 학술대회가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의)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고 답했다.
이 전 상임위원은 이어 “2017년 1월 중순, 고영한 법원행정처 차장 주재 실장 회의에서 (인사모의) 공동학술대회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으므로,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는 공동학술대회에 대한 대응 차원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문제의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는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고영한 차장으로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인사모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그 말씀을 들은 기억은 난다”고 밝힌 이 전 상임위원은 “그러나 인사모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대외활동이 대법원에 부담을 주니까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사모와 같은 소모임은 대법원장이나 행정처장이 없앨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3월27일, 4월1일과 3일에도 증인으로 나왔던 이 전 상임위원 5월6일 한 번 더 법정에 나와야 한다. 다음 재판인 오는 4월17일에는 한승 전 사법정책실장이 증인으로 나온다.
‘사법농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은 △헌법재판부 내부 동향 및 정보 파악 △주요 사건 재판 개입 △비위 법관 무마 및 법관 블랙리스트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입법·행정부와의 거래 등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