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득권 혁파 한국판 트럼프 등장의 가능성

    사형집행 재개, 北核 지원자 일제 검거, 보안법 강화, 낭비적 복지 개혁,
    병역기피자 공직 취임 영구 금지, 자위적 핵무장, 국회의원과 지방의원들에게 일당만 지급,
    李承晩 동상 광화문 건립, 간첩 수사 강화, 폭력 시위 엄단 등을 공약하는
    한국판 트럼프가 등장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趙甲濟  
     
트럼프가 희대의 逆轉勝으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동시에 실시된 의원 선거에서 상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90%이상의 언론과 여론조사가 클린턴의 압승을 예측하였으나 빗나갔다.
불만이 가득하였던 백인 중하층이 주도한 선거혁명이다.
 언론과 지식인층에선 집중적으로, 편파적으로 트럼프를 비방하였지만 백인들은 겉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투표일만 기다렸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과 흑인, 그리고 이민정책과 낭비적 복지에 대한 反感이 폭발한 것이다. 클린턴 후보가 성추문 前歷이 있는 남편을 두고도 트럼프의 지나간 성희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운동방식도 自害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선 것도 백인들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영국의 EU 탈퇴 결정,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 등장 등과 맞물려 세계를 휩쓰는 보수적 정치혁명의 바람이 한국의 내년 大選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 같다.

기득권 정치, 언론, 관료에 대한 분노를 모아서 정치 동력으로 만들 수 있는 인물이나 조직이 나온다면 국가 개조의 계기를 잡을 수도 있다.

공무원 감축, 규제 혁파, 세금 줄이기, 死刑집행 재개, 北核 지원자 일제 검거, 보안법 강화, 낭비적 복지 개혁, 보안법 위반자-부패전력자 -병역기피자 公職 취임 영구 금지, 前職 대통령 비자금 수사(전두환 노태우 제외), 자위적 핵무장, 국회의원과 지방의원들에게 일당만 지급, 800년이 넘는 道 제도 개편, 귀족 노조 개혁, 검찰의 권력 남용 견제, 李承晩 동상 광화문 건립, 간첩 수사 강화, 폭력 시위  엄단, 국군포로 송환, 漢字교육으로 韓國語 정상화 등을 公約하는 한국판 트럼프가 등장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부류는 세 가지라고 한다. 바보, 젊은이,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미국의 기득권 정치판에선 아웃사이더였다(미국의 보수적 기득권 세력도 트럼프를 반대하였다). 한국에서도 기득권 정치에 물들지 않은 외부 인사라야 國家改造 차원의 선거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당선은 1948년의 트루먼 역전승 이후 최고의 정치 異變으로 기록될 것이다. 뉴욕 타임스 등 존경 받던 언론도 이번 선거 보도는 너무나 편파적이었다. 이런 知的 오만을 미국 유권자들이 심판한 것이다. 정치에선 자만이 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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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있었던 트루먼의 逆轉勝(역전승)은 미국 정치사상 최대의 異變이다. 모든 언론, 모든 여론조사 기관, 모든 정치인들이 공화당 후보 토마스 E. 듀이의 大勝을 예측했었다. 9월 초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듀이는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 트루먼을 여론 조사에서 13%(44 대 31)나 앞섰다. 갤럽, 해리스, 로퍼 등 여론 조사 기관은 이런 시기의 이런 大差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투표일 數週 전에 여론조사를 중단하였다.

당시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선거운동은 하나의 儀式일 뿐 선거 결과는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을 믿었다. 선거운동 기간중에 지지 후보를 바꾸는 유권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관례에 비추어 이 선거는 선거운동 시작 전에 이미 끝나버린 셈이었다. 만약 여론조사가 투표일까지 계속되었더라면 그런 誤判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임, 라이프 같은 잡지는 듀이의 승리를 전제로 한 기사를 준비하였다. 라이프는 선거 전의 마지막 호에서 듀이의 사진을 실으면서 '차기 대통령이 페리보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灣을 지나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시카고 트리뷴紙는 개표가 진행중일 때 1면 머리에 '듀이가 트루먼을 패배시키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배포하였다. 트루먼을 수행하는 기자들 중 트루먼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트루먼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민주당의 중진 두 사람이 탈당, 출마한 점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래서 부통령을 지냈던 헨리 A. 월레스는 진보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에 비교하는 등 매우 좌파적인 성향을 보였다.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反蘇정책에 반대하는 월레스 당시 농무장관을 해임하였었다. 1948년 선거에서 월레스는 트루먼의 마셜 플랜, 트루먼 닥트린 등 冷戰의 기본 전략에 반대하였다.

한편 민주당의 右派인 남부 세력이 트루먼의 親흑인 정책에 반발, 州權민주당을 만들어 사우스 캘로라이나 지사인 스트롬 서몬드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트루먼은 민주당에서 極左, 極右 세력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큰 타격을 받은 듯하였다.

트루먼의 선거전략은 공격적이고 단순하고 인간적이었다. 그는 공화당이 上下院을 지배한 상태의 의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대만 한 집단'이라고 공격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야당 투사가 된 것처럼 공화당의 의회를 때렸다. 트루먼은 거의 원고도 보지 않고 연설하였다. 트루먼은, 미국 중부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작은 상점도 경영한 적이 있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는 자원하여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정치판에 뛰어들어선 구청장 선거에서부터 시작하여 상원의원까지 올라온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말은 솔직하였으며 인간성과 鬪志가 넘쳤다.

듀이는 반대였다. 뉴욕주 知事를 두번 역임한 그는 40대의 나이로 1944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위협하였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전형적인 동부 엘리트였다. 외모가 차갑고 딱딱하게 보였다. 그는 선거 운동을 守勢的으로 하였다.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대통령 자리는 '나의 차지'라는 생각이 그를 '재미 없고, 인간적으로 매력 없는 후보'로 만들었다.

듀이는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의 앞에 있습니다' 식의 하나마나한 연설을 하여 트루먼과 대조가 되었다. 양쪽에선 극장 용 홍보영화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듀이는 인간미 없는 사람, 트루먼은 세계 지도자와 어울리며 뭔가 큰 일을 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여론조사나 언론의 판단과는 상관 없이 트루먼의 전국 유세는 많은 청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농민 노동자 소상인 등 서민층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드러났는데도 기자들은 냉담하였다.

11월2일 투표 날, 트루먼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트루먼뿐이었다. 심지어 부인조차도 패배할 것이란 예감을 가졌다. 트루먼은 고향인 미조리주에서 투표를 마치고 경호원들만 데리고 근처의 온천 휴양소에 가서 목욕을 한 뒤 일찍 잠에 들었다. 자정 무렵 트루먼은 깨어났다. 라디오를 트니 그가 全國 득표에서 크게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라디오 진행자들은 '개표가 진행됨에 따라 듀이가 따라잡을 것이고 결국 이길 것이다'고 해설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다시 잠에 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라디오를 켜니 그는 전국 득표에서 200만 표나 앞서 있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캔사스 시티로 돌아갔다.

트루먼은 전국에서 49.6%의 득표율을 보였다. 듀이는 45.1%였다. 選擧人團數에서 트루먼은 303표을 얻어 189표를 얻은 듀이에 大勝하였다. 事後 여론조사 결과 듀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중 14%가 선거기간중 트루먼 지지로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승부를 건 트루먼의 공격적인 전략과 인간적인 매력이 그를 대통령으로 再選시켰다. 대중정치에서 후보의 인간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 선거였다.

석 달 전 필자는 트루먼의 역전승 전략을 새누리당이 참고로 할 만하다고 썼다.

<새누리당이 오는 大選에서 지지 않으려면 트루먼식 역전승 전략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야당이 된 기분으로, 도전자의 자세로 대기업이 아니라 從北 좌파를 부패 기득권세력으로 규정, 공격하는 것이다. 남한 좌파뿐 아니라 북한의 守舊좌파 김정은 정권을 함께 공격, 남북한에 걸친 좌익연합세력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동시에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다'는 구호 아래 보수自淨의 공약을 내어놓아야 한다. '병역기피, 부패, 보안법 사범은 영구적으로 공직 취임을 금지시키겠다'는 약속 같은 것이다. 
새누리당이 남북한 종북좌익세력을 기득권세력으로 규정, 도전자의 입장에 서서 좌익보다 더 처절하게 싸워야 동정표가 갈 것이다. 종북좌파는 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특권층이다. 法治국가에선 법을 무시하는 게 가장 큰 특권이고 기득권이다. 

한국인들은 약해 보이는 도전자를 동정하는 특성이 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끈 새누리당이 4.11 총선에서 역전승한 것도 도전자 입장을 취하여 약하면서도 공격적으로 보였기 때문이고 한명숙과 이정희가 기고만장하여 오만, 저질, 반역의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이다. 대세론을 탄 박근혜 씨는 요사이 '고집不通'의 모습을 보이면서 도전자가 아니라 챔피언처럼 행동한다.  챔피언 방어전을 하는 자세로 조심조심하다간 듀이 꼴이 날 수도 있다. 그는 종북척결이란 시대적 과제도 외면한다. >

트루먼의 역전승의 큰 덕을 본 것은 한국인이었다. 1950년 6월24일(미국 시간) 밤 늦게 트루먼 대통령은 週末을 보내기 위하여 고향인 인디펜던스의 자택에 가 있었다. 그때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북한 공산군의 전면 南侵을 전화로 보고하였다. 트루먼은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라고 내뱉었다. 이 말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산 것이다. 지금 5000만 명이 그 결단의 덕으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미국은 美軍을 파병할 아무런 조약상의 의무나 戰略上의 이유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을 버려야 할 이유는 많았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스탈린, 毛澤東, 김일성이 예상하지 못한 大결단을 내렸다. 1948년 大選의 逆轉勝처럼 1950년의 派兵 결심도 그 원인을 트루먼의 인간성에서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신중한 토마스 E. 듀이가 앉아 있었더라면 '즉각 파병'의 결정이 떨어졌을까? 촌각을 다투는 戰況속에서 '신중한 결정'은 한국의 赤化를 의미하였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