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는 김종인에 활쏘고 문재인은 측면 지원, 친박도 잇속 챙겨… 군중만 박수
  •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왼쪽)와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오른쪽). 두 사람은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치열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왼쪽)와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오른쪽). 두 사람은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치열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필리버스터 정국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며 '출구전략'을 시도했지만, 새누리당은 "여야에 정식으로 제안한 중재안이 아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여야 간 물밑협상이 좀처럼 성과를 못 내는 가운데, 여야 모두에게서 필리버스터 정국의 수혜자가 있으므로 교착상태가 풀리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천 싸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누군가는 현재 정국이 내심 반가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친노와 친박, 국민의당 모두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 친노는 필리버스터가 내심 반갑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에게 당권을 뺏긴 친노는 필리버스터가 내심 반가운 분위기다. 친노는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적극적으로 토론을 신청하고 앞장서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화살을 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를 향한 항의에 가깝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는 당에 들어온 후 공천권을 틀어쥐고 마이웨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앞서 혁신위원회가 컷오프 명단을 제시했지만 이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자세도 감지됐다.

    김 대표는 홍의락 의원과 문희상 전 비대위원장이 컷오프 명단에 포함되자 "대안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인 대표의 특명을 받은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도 앞서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20%라는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지난 17대 때에도 40~50%의 현역이 교체됐다"는 말로 친노 의원들을 긴장시켰다.

    이처럼 좀처럼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친노 의원들에게 필리버스터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의정활동 막판, 새 얼굴로 기울게 돼 있는 구조에서 필리버스터를 통해 익숙한 얼굴을 알릴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필리버스터가 김종인 대표를 향한 성토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필리버스터의 두 번째 주자로 나서 10시간을 버티며 존재감을 뽐냈던 은수미 의원은 한때 컷오프에 포함됐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는 성남 중원을 자신의 재선 지역구로 정했다.

    서럽게 울면서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불러 언론의 조명을 받은 강기정 의원 역시 정장선 총선기획단장으로부터 자신의 지역구를 전략공천 하겠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최민희 의원과 김현 의원은 비례대표로 각각 남양주 병과 안산 단원갑 출마를 준비 중이다. 서울 마포 을의 정청래 의원도 은수미 의원의 기록을 갱신하며 존재감을 부각시키는데 필리버스터를 활용했다.

    이 구도는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는 김종인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와의 온도 차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는 필리버스터에 대해 지난 26일 "소수정당이 다수 정당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있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는 앞서 "선거구 획정이 다른 어떤 법안보다 중요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반면, 문재인 대표는 적극적으로 응원에 나서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표는 SNS에서 김광진 의원과 은수미 의원, 그리고 강기정 의원을 향해 "잘했다. 대단하다. 힘내라"는 글을 적으며 측면을 지원했다. 또, 지난 27일에는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는 이유에 대해 장문의 글을 적기도 했다.

    문재인 대표는 "법원의 영장이 필요한 형사소송법상의 압수수색조차도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마구 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라며 "그 위험성을 막을 실효적 통제 수단이 마련돼야 한다"고 비난했다.

  •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 친노로 분류되는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한편, 필요성을 역설한 장문의 글을 링크하기도 했다. ⓒ트위터 화면 캡처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전면에 나선 모양새다. 친노로 분류되는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한편, 필요성을 역설한 장문의 글을 링크하기도 했다. ⓒ트위터 화면 캡처

    ◆ 친박의 복잡한 계산…선거구 획정 지연 독 될까?

    친박으로서도 선거구 획정 지연은 내심 반가울 수 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에 "이미 마지노선에 와 있다"며 강공으로 맞설 것을 시사했다. 선거구 획정이 지연돼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강수를 둔 것으로 풀이된다.

    새누리당은 필리버스터 정국이 야당에 의해 일어난 것인 만큼, 야당이 끝내야 한다는 의견이다. 새누리당 문정림 원내대변인은 "필리버스터를 접는데도 명분이 필요하니 자기 뜻대로, 새로운 수정안을 받으라는 더불어민주당에 새누리당이 아무 생각 없이 동의할 수는 없다"면서 "이제 더불어민주당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필자해지' 하라"고 주장했다.

    친박이 필리버스터를 반기는 배경에는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새로운 진박감별사인 최경환 전 부총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진박마케팅에 나선 친박 후보들이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뒤집을만한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이 새누리당에 덜 부담되는 국면이라는 점도 호재다. 그간 정부·여당으로서 쟁점법안 처리 등 책임감을 안고 있었던 친박으로서는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그 책임을 상당 부분 덜게 됐다.

    필리버스터는 기본적으로 '국회의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다. 필리버스터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국회의 의사진행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겠다는 뜻이 된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강하게 할수록 이에 따른 책임 또한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를 의식한 듯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도 새누리당에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의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그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 맞서 '단수추천제' 등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대립 각을 세우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그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 맞서 '단수추천제' 등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대립 각을 세우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일찌기 총선 연기론 주장했던 국민의당에겐…

    국민의당은 일찌기 총선연기론을 주장한 바 있다. 지난 1월 13일,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총선이 불과 100일도 남지 않았는데, 사상 초유의 무법적 선거구 실종 사태가 초래되고 말았다"면서 "이제는 국민의 선택권과 참신한 정치 신인의 출마 기회를 넓혀주기 위해 총선 연기를 검토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국민의당은 최근의 상황은 이때보다 더욱 나빠졌다.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주저앉고, 한 지붕 다섯 형제가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천정배 의원과 정동영 전 장관의 합류로 계파 간 갈등문제는 여전한 뇌관이다. 어려운 시기에 여러 갈래의 주장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 셈이다.

    국민의당 천정배 공동대표는 '국민회의'에서 외쳤던 뉴DJ플랜에 따라 호남물갈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26일에도 "현역 의원이 신진 인사보다 당선 가능성이 크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며 불을 땠다.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더민주에서 건너온 호남 현역의원들 처지에선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결국, 호남에 대한 공천 향방에 따라 당내 갈등은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집안 정리를 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국민의당 김정현 대변인의 경우는 취재진에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하는 것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면서 "(필리버스터에)힘이 떨어지면 가서 힘을 보태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 ▲ 국민의당 의원총회 모습. 국민의당은 최근 정동영 전 장관을 영입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민의당 의원총회 모습. 국민의당은 최근 정동영 전 장관을 영입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3당 모두 거절할 이유 없지만… 각자 셈법은 달라

    야권 지지층 일각에서는 필리버스터를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의회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속내를 털고 보면 현역을 위한 레드카펫에 군중들이 박수만 쳐주는 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선거구 획정이 늦춰지면 일반적으로 현역에 유리하다"면서 "경선과 총선 일정이 늦춰지면 득을 보는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필리버스터 정국이 마냥 싫지는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필리버스터가 장기화될지 여부는 오는 29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여야는 선거구획정안을 29일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선거구획정안을 통과시키려면 어떻게든 필리버스터 정국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끝날지는 미지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다수가 참석한다면 필리버스터는 2월 국회가 끝나는 다음 달 11일까지 계속될 수 있다.

    국회 정상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시선을 필리버스터에 쏠리게 한 뒤 국회의원들이 각자 잇속을 위한 딴 생각만 하고 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