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파트너로서 모습 못 보여주면 "말(馬) 임명하자" 말 나올 수도
  • ▲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16일 국회에서 행해진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16일 국회에서 행해진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도발 등으로 한반도에 엄중한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16일 국회를 찾아 국민의 단합을 호소하는 국정 현안 연설을 행했다.

    이는 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국사행위(國事行爲)다. 헌법 제81조는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해 발언하거나 서한으로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에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과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이 혼재돼 있지만, 이 국회출석·발언권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이라고 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총선을 치른 뒤 새로운 국회가 개원(開院)할 때, 직접 국회로 찾아가 개원 축하 연설을 해왔다. 또, 취임 첫 해의 예산안 시정 연설은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게 헌법적 관례로 돼 있다. 그러나 개원 축하나 예산안 제출 외의 국정 현안에 관해 대통령이 국회로 찾아가 특별 연설을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11년 만의 일이다.

    11년 전인 2005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2년 간의 국정 파탄을 일응 반성하고 일응 변명하면서 의원 정수 확대 등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국회를 찾아 특별 연설을 했다.

    그 이전에는 △국군의 이라크 파병동의안 의결 호소(노무현, 2003년 4월 2일) △APEC 정상 회의 성과 설명(김영삼, 1993년 11월 29일) △국정 전반의 개혁을 통한 신한국 건설 주장(김영삼, 1993년 9월 21일)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전격 발표(노태우, 1989년 9월 11일) 등 네 차례의 국회 특별 연설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특별 연설은 1987년 개헌을 통해 현행 헌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이후 여섯 번째의 특별 연설이 되는 셈이다.

    이로써 87년 체제 성립 이후 권좌에 오른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해 볼 때,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가장 존중하고 예우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뚜렷해졌다.

  •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 박영선·우윤근 전 원내대표, 이윤석 조직본부장,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 이목희 정책위의장, 민병두 민주정책연구원장 등 당직 의원들이 16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 박영선·우윤근 전 원내대표, 이윤석 조직본부장,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 이목희 정책위의장, 민병두 민주정책연구원장 등 당직 의원들이 16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역대 대통령들은 개원 축하 연설과 취임 첫 해의 예산안 시정 연설을 제외하고는 국회 방문에 인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실시된 16대 총선 때문에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자 단 한 차례 개원 축하 연설을 하는데 그쳤으며, 임기 첫 해의 예산안 시정 연설조차 국무총리로 하여금 대독케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5년 임기 중에 총선이 두 차례나 치러지면서 2008년과 2012년, 각 18대·19대 국회 개원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으나, 그 외에는 임기 첫 해인 2008년 10월 27일에 예산안 시정 연설을 한 게 유일한 국회 방문 연설이었다.

    9선으로 역대 최다선 의원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첫 해인 1993년 의욕적으로 국회를 두 차례나 찾아 특별 연설을 했으나, 이후 국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각종 비리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국회를 멀리 했다. 1996년에는 15대 총선이 치러진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국회를 찾아 개원 축하 연설을 한 게 고작이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임기 3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정기국회 중 예산안 시정 연설을 몸소 했다. 국무총리에게 대독시키지 않고 직접 국회를 찾는 것 자체가 이미 입법부에 대한 존중이다.

    이번 사안만 해도 엄중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대국민담화 대신 국회 특별 연설이라는 형식을 택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비춰볼 때 매우 적절하다는 지적이다. 국회를 국정의 파트너로 삼아 의회주의적 관점에서 최대한 예우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권력자가 국민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호소하는 정치는 자칫 중우정치(衆愚政治)와 민중독재(民衆獨裁)로 흐를 우려가 크다. 민주주의의 역사에 비춰봐도 민의가 하나로 수렴하는 곳은 어디까지나 의회이고 대통령은 '선출된 임기제 국왕'이라는 측면이 있는 만큼, 국민이 투표를 통해 직접 선출한 대의대표를 존중하는 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문제는 우리의 대의대표들이 대통령이 보여준 예우에 걸맞는 예의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가 없다.

  • ▲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국민의당·국민회의 등 이른바 야권 신당들을 조롱하는 내용의 웹툰을 찾아보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국민의당·국민회의 등 이른바 야권 신당들을 조롱하는 내용의 웹툰을 찾아보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대통령의 국회 특별 연설이 끝난 뒤 비판적인 반응을 내놓는 것은 반대를 속성으로 하는 야당의 성격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야당(the opposit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강한 반대'(Opposition)라는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다만 대통령 연설에 대한 반응은 별론으로 하고, 대통령이 예의를 갖춰 국회에 찾아와 연설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대의대표들도 상응하는 예의를 갖춰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일례로 지난 2001년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9·11 테러가 터졌을 때, 직전해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보다 유권자 직접 득표 수에서 50만 표 앞서고도 선거인단에서 271대267로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던 앨 고어는 "부시는 나의 최고사령관"이라는 말로 국가안보 앞에서는 여야가 없다는 점을 표현해 미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의 대의대표들이 이날 보여준 모습은 어떠했나.

    얼마 전까지 제1야당의 당수였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하는 동안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경남 양산에 머물며 정국 구상은 지겹도록 하고 있을텐데, 전날 국방위에 이어 이날 대통령 국회 연설까지 겨우 이틀 서울에 올라와 잠깐 본회의장에 들어와 있는 사이에 또 무얼 그리 생각할 게 많은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은 대통령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본회의장 의석의 모니터를 통해 국민의당·국민회의 등 야권 신당을 조롱하고 폄훼하는 내용의 웹툰을 보는 모습이 뉴스통신사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같은 당의 은수미 의원은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위해 본회의장으로 입장하는 상황에서 동료 의원들이 모두 기립한 가운데 홀로 꿋꿋이 착석해 있는 추태를 보였다. 또, 이목희 정책위의장은 연설이 진행되는 내내 좌우를 둘러보거나 목을 뒤로 젖혀 스트레칭을 하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가 하면 고개를 돌려 뒷줄에 앉은 우윤근 전 원내대표, 변재일 의원 등과 뭔가를 수근거리는 등 어수선한 움직임을 보였다.

  • ▲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국회의원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 국민들이 4년 전 소중한 주권의 행사를 통해 뽑은 것인데, 자기네 지역구 의원이 본회의장 안에서 이러한 행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역구민들은 그야말로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 아닐까.

    이외에도 많은 야당 의원들이 헌정 사상 11년 만에 진행된 대통령의 국회 방문 특별 연설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모습을 보여준 게 사실이다. 대통령이 국회를 예우하는 만큼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못한 모습이 국회출입기자로서 진심으로 부끄럽고 안타깝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는 치세 초창기에 적극적으로 원로원과 국정을 함께 이끌어가려 했다. 원로원 회의에 빠짐없이 출석했으며, 토론되는 의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대귀족들의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원로원은 제국으로 팽창한 로마의 국정 운영이라는 무거운 짐을 나눠줄 의지도, 책임감도 없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충고도 하고 일침도 가해봤으나, 원로원의 운영 행태가 변하지 않자 점차 비아냥거리는 자세로 옮겨가다가 최후에는 아예 원로원을 무시하고 섬에 틀어박혀 혼자 결정하고 통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비극적 결말이다. 대통령이 의회를 무시하고 통치하는 모습은 현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입법부에 보여주는 예우에 걸맞는 예의를 우리의 대의대표들도 대통령에게 갖춰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간절하다. 그렇지 않으면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Caligula)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후세에 "차라리 내 애마(愛馬)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는 게 낫겠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