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시에는 그들은 모두 동맹국”
    뻔한 결론... 믿을 건 결국 “우리의 힘”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65년 전 그 해 그 겨울은 유난히 춥고 매우 길었다고 들었다.
      = ...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지역에서
    국군과 첫 전투를 벌이고, 군우리(개천) 전투에서 미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12월 4일에는 평양을 적에게 내 주었다.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앞에서 버텨낼 군대는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유엔군과 한국군은 계속 후퇴해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내주었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평택과 안성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했다.
      여기서 미국은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를 떠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갈림길에 놓였다.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제주도나 사모아로 옮길 것까지도 검토했다.
    대한민국이 사라지게 될 위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승만의 확고한 전쟁 의지에 감격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나는 여기 머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에 따라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선 근처에 이르렀다... = <이주영 저, 「이승만 평전」, 2014년, 살림>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몇 가지의 메시지를 전한다.
      ①누가 뭐래도 중국 공산당은 침략자였다.
      ②누란(累卵)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정면 돌파하려는
    국가 지도자의 고집스런 신념과 결기가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국민들의 단합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 똥배짱이라도 부릴 수 있다.
      ③태평양을 건너 온 미군의 역할도 무척 중요했다.

      병신년(丙申年) 벽두, 북녘의 4차 핵실험으로 절박한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이 나라는 좀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難題)의 덫’에 걸려 있는 형국이다.
      대북 확성기를 틀었다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은 다 안다.
    물리적인 응징 보복이나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도 하기좋은 말이지
    앞뒤 안 가리고 덜렁 실행할 수도 없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외치고, 미국의 전략 무기가 전개된다 한들
    “언 발에 오줌 싸기” 정도?
    이 나라에서 일기 시작한 ‘핵무장 불가피론’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도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동맹국의 순수한 ‘으리’ 쯤으로 받아들이는 게 속은 편할지 모른다.

  •   “국제사회와 공조 하에 강력 대응”을 외친다.
    글쎄 그것이 가능하고, 가능하다 해도 과연 실효성이 기대를 충족시킬만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저 고육지책(苦肉之策)에 가깝다. 냉엄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국(倭國)은 한 마디로 신났다. 호들갑이다.
    “자체적인 대북 제재”까지 띄우며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
    속된 말로 “화장실에서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는 표현이 적격이다.

      뛔국의 경우, 당일(1월 6일)에는 성난 표정으로
    당장 어린 돼지 귀싸대기라도 올려붙일 기세였지만,
    원래 셈법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국제 핵 비확산을 수호하고 핵실험을 반대하는 것은 중국의 일관되고 명확한 입장...
    중국은 각국과 함께 소통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핵 문제를 조속히 대화 궤도로 되돌려놓기를
    희망한다” 무엇을 뜻하는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일각에서는 “지난 9월 북경(北京) 망루에 국군통수권자가 올라갔지만, 배신당했다. 대(對)중국 외교가 실패했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그건 ‘배신’이나 ‘실패’라기 보다, “다 그런 거 아닌가”가 맞다.

  •   “... 1910년에 한국인들은 그것을 다 경험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던 열강 세력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구경꾼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들은 동정심을 표하기는커녕
    등을 돌리고 “비겁하고 퇴화된 조선인”이라고 조롱했다...”
    <이승만, 「JAPAN INSIDE OUT」>
    그러면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하셨다.
      “평화 시에는 그들은 모두 동맹국이었다”

     
    결국 난제(難題)를 풀 열쇠는 싫든 좋든 이 나라 국민들이 쥐고 있다.
    힘을 모으고, 빠르게 힘을 더 키우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북녘의 세습독재가 ‘포기할 수 없는 핵무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끔 해야 한다. 되도록 빨리...

      이것을 결심·결행하지 못하면, 또 다시 멀거니 “5차 핵실험,
    이때는 진짜 수소탄”을, “SLBM(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성공적 발사”를 쳐다봐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허공에 대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지럽고 한심하기까지 한 정치판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국민들의 치솟는 분노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엄혹한 내외 경제 현실 속에서도 노동귀족들은 시급한 ‘노동개혁’을 발로 걷어차고 있다.

  • 젊은 청춘들 사이에서는 금·은·흙 ‘수저’ 타령이 계속된다.
    이에 편승하여 “경험에 따라 계몽된 적 없는 젊은이들”을 흔드는
    ‘배워 처먹은 기득권 지식인’들의 얼간이 짓거리들도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이 외에도 많지만, ‘단합된 국민의 의지’와는 영 딴 방향이다. 그래도...

      ‘수저’를 내려놓고 대신 차가운 총신(銃身)을 다잡은 채,
    오늘도 온몸으로 칼날 같은 북풍(北風)을 받아 안으며 묵묵히 땅과 바다와 하늘을 지키는
    또 다른 우리의 젊은 청춘들이 있다.
    이리저리 통빡을 굴리느라 확성기 트는 것조차 머뭇거린 ‘국민의 군대’ 수뇌부는 말고.

      “1월 13일 경기 북부와 강원 일대에 한파 경보가 발령됐다”
      그들에게 찐한 성원과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희망을 본다.
      ‘국민의 군대’ 파이팅!!!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