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반세기전 미국 국빈방문의 교훈

  •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워싱턴문화원장

올해 5월 16일은 꼭 반세기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을 시작한 날이다. 1965년 5.16∼27일 기간 방미외교를 통해서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우리 외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 이러한 성공은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 미국과 한국이 당면했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61년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위기 해결에서 보듯이 소련의 팽창정책에 강력히 대응했다. 그러나 1963년 11월 흉탄에 맞아 서거하고, 존슨 부통령이던 대통령직을 이어 받았고,
     베트남전쟁은 본격화됐다. 

    군사정부를 거쳐 민주선거를 통해서 1963.12.17일 취임한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본격 착수했으며, 1964.12월 독일 국빈방문으로 종자돈을 마련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재원확보를 위해서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미국으로부터 베트남전쟁에 국군파병 요청을 받았지만, 국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서 그 어느 아시아의 지도자도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적인 환대를 받았다. 존슨과 박 대통령 내외가 워싱턴 DC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일 때는 76만 명의 인구 중 13만 명의 시민이 거리에서 환영했으며, 뉴욕에서도 100만 명의 환호 속에 성대한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고 한다. 

    미국측의 환대는 이런 외형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한미 양국 정상은 2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1965.5.18일 14개 항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국의 한국 원조, 한국 내 미군사력 유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도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유지·강화, 개발차관 1억 5천만 달러 제공, 한미행정협정의 조속 타결 등이 주요 골자다. 

    특히 1억 5천만 달러의 개발차관은 놀라운 성과였다.
    그 규모와 의의가 어떤 것인지는 미 국제개발처가 1959년 개편·발족된 이후 1965년까지 6년 동안 우리나라에 제공한 차관 총액이 고작 1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환대는 박정희 정부가 ‘우리의 국익 추구만이 아니라, 상대의 국익도 배려’하는
    ‘주고받는(give and take) 외교’를 오랫동안 일관되게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4년 동안의 국내정치 발전과 일관된 외교정책 추진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첫째, 1961년 5.16혁명은 한미 양국 사이에 갈등과 위험을 초래한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와 여론이 혁명세력의 민주주의와 반공 의지에 대해서 강한 불신과 비판의 눈초리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반공에 관한 의혹을 해소하고 미국측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거사 직후부터 정식·비공식 외교채널을 동원해서 케네디 대통령과 미국 정부에 대해 혁명의 필요성과 향후계획에 대해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또한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방미하여 양국이 추구하는 이념과 목표가 같음을 확신시켰고, 1963.10.15일 자유민주선거에 의해서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둘째,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에 대한 우려와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우리보다 더 바라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국내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국교정상화를 추진했으며, 방미 한 달 후인 1965.6.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 독도 문제에 일본측 요구 일축, 기막힌 정답 제시
    참고로 당시 우리 정부의 독도 문제 처리가 잘못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답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한일협상 과정에서 일본측은 독도가 분쟁지역이므로 해결책이 협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우리측은 독도가 한국 고유 영토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협정조인 날까지 계속된 갈등은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으로 해결됐다.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의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하여 해결을 도모한다.”

    일본측은 교환공문 서두의 “양국 간의 분쟁” 앞에 “독도를 포함한”이란 문구의 삽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측 반대로 무산되었고, 한일협정 문안 그 어디에도 독도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일본측이 한국의 실효적인 독도 지배와 영유권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박정희 정부는 국군을 베트남전쟁에 파견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혈맹으로서의 신의(信義)를 지켰다. 1964.9월 이동외과 의료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파견을 시작으로 방미 3개월 전인 1965.2월에는 2,000여 명의 비둘기부대(후방군사원조지원단)를 파병했다.
    전투병력 파병은 박 대통령의 국빈방문 직후인 1965.7.2일 결정됐다. 

    이후 1973.3월 완전철수 할 때까지 8년 동안 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총 34만 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우리는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나, 그런 고귀한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인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고, 군사기술 및 장비의 현대화와 한미군사동맹 관계를 증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달에 취임 후 세 번째로 미국을 방문한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지난달 방미하여 미일 동맹의 질적 변화를 도모하고, 일본 총리로서 역사상 첫 상·하원합동연설을 하는 등 밀착관계를 과시했다며, 박 대통령의 이번 방미가 우리 외교의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나아가 한국 외교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획기적인 대북 제안 등의 필요성을 말한다.
  •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5년 미국 국빈방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외교적 성과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외교당사국간 이해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첫 방미 때 상·하원합동연설을 했고, 이번이 다섯 번째 한미정상회담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타임테이블에 맞춰 한미외교를 추진 중이며, 내달 방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우리 외교부가 이번 방미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외교목표를 마련해 두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아베 총리의 그것과 비교하거나, 획기적인 제안에 의한 외교적 주도권 확보 등을 운운하는 것은 극히 아마추어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그간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서 합의한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여부를 돌아보고, 급변하는 동북아정세에 향후 어떻게 대응할 지에 관한 차분한 논의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