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교수 “자유통일 대한민국, 대륙-해양문명의 교차점 될 것”
  • ▲ 강규형교수ⓒ 뉴데일리
    ▲ 강규형교수ⓒ 뉴데일리

    며칠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省)의 하얼빈(하르빈·Harbin)에 다녀왔다.
    한국선진화포럼(설립자 故 남덕우, 이사장 이승윤, 회장 손병두) 정책위원회의 하얼빈 탐방 일정이었다.

    하얼빈은 원래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란 뜻을 지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쑹화(松花)강변의 한적한 어촌이었다가 러시아가 1898년 동청철도(東淸鐵道, 중동(中東)철도라고도 함)를 건설하면서 세운 도시다.

    러시아인을 위시해서 여러 민족의 서양인들이 몰려와 활동했기에 상하이보다도 더 빨리 서양의 문물과 패션이 들어와 [동양의 모스크바] [동방의 파리]라 불릴 정도였다.

    하얼빈은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문명의 교차점이었다.
    칭다오보다 먼저 맥주를 만든 곳도, 중국 최초의 서양식 음악학교가 세워진 곳도 하얼빈이었다.

    이번에 방문한 하얼빈공대(HIT)의 본관은 모스크바대의 본관을 그대로 본따서 만들었다.
    러시아가 철도건설 기술자 양성을 위해 1920년에 설립한 이 학교는  이후 러시아와 일본 교수진의 도움으로 굴지의 공대로 커나갔고, 이제는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등 우주항공과학을 선도하는 학교가 됐다.
    이 학교의 박물관은 일본 지배시기의 대학 역사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전시할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번 여정의 백미는 올해 1월에 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이었다.
    작년 베이징을 방문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하얼빈 역에 안 의사 기념물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했고, 시진핑 주석은 아예 기념관을 만드는 통 큰 화답을 했다.


  • ▲ 올해 1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연 하얼빈역.ⓒ 연합뉴스DB
    ▲ 올해 1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연 하얼빈역.ⓒ 연합뉴스DB

    관광명소로서도 좋고, 일본에 대한 경고메시지로서도 제격이니 일석이조의 결단이 아니겠는가.

    탐방단 일행이 기념관을  방문한 날은 바로 10월 26일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었고, 당시 저격시간인 오전 9시 반에 맞춰 헌화를 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저격 장소가 큰 유리를 통해 훤히 보이게 설계된 기념관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곳은 이미 한국인과 조선족뿐 아니라 중국인도 많이 찾는 하얼빈의 중요 사적지 중 하나가 됐고, 그 정신적․물질적 가치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열강들이 경쟁·협력하는 다층적이고 야생적인 공간은 야성적인 투사가 출현할 무대를 마련했다.
    안중근이란 인물과 하얼빈이란 장소가 교차해서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었다.

    이토를 저격하고 나서 러시아 헌병들이 있는 앞에서 힘차게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까레야 우라·Корея Ура)!”를 외치고 의연하게 체포됐으며, 재판과정과 사형 순간에도 논리정연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통해 오늘날 EU와 비슷한 동양 3국 평화체제를 제시했으니,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가.
    그는 난세(亂世)의 영웅이었다.

    사실 이토는 일방적인 조선 병합을 반대했던 온건파였다.
    그래서 그가 살아있었으면 역사가 달라져 병합이 없었거나 지연됐을 것이며, 안의사가 이토 대신에 즉각적 병합을 주장한 강경파 리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척살 대상으로 삼았어야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가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서 일본의 조선지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한국인들은 일본 정계 내부의 이런 의견 대립을 알 수 없었다.

    만주는 욕망이 꿈틀대는 동양의 신천지였다.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만주 웨스턴(서부극)]의 무대이기도 했다.
    온갖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난장(亂場)을 형성했으니 그 중심이 하얼빈이었다.
    요즘도 인구 900만이 넘는 거대도시지만 당시 하얼빈은 다채롭고 융성하는 국제도시였다.

    천재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러시아를 사랑해서 러시아어를 독학했다.
    1939년 기자로 일하던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시(詩) 1백 편을 건지러] 홀연히 만주로 떠난 그는 러시아인 촌락을 찾아가고 러시아를 느끼기 위해 하얼빈에 자주 들렀다.
    광복 후 고향 평북 정주에 돌아온 그는 북한체제 하에서 시작(詩作)을 사실상 포기하고 양치기로 살면서 러시아문학을 번역했다.

    만주로 떠나기 직전 쓴 그의 대표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타샤는 누구일까?
    백석이 사랑한 여인들일까? 아니 어쩌면 백석 마음 속 이상의 연인일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나타샤는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여성 이름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사랑스런 여주인공도 나타샤가 아니었던가.

    당시 한반도의 많은 지식인들은 대륙을 동경하는 [북방(北方) 취향]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백석은 만주로 향했다.
    러시아와 대륙을 온몸으로 갈구하면서.

    중국공산체제 하에서 하얼빈은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한때 많이 잃고 침체했었다.
    그러나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누릴 기회가 왔다.

    박근혜 정부가 추구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만들어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장차 하얼빈이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거점도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만 말썽부리지 않고 참여한다면, 기존의 시베리아횡단철도(TSR)망(網)이 런던에서 부산(혹은 일본)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확대될 수 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원코리아 뉴라시아 프로젝트도 같은 취지를 공유하고 있기에 그동안 힘차게 대륙을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막혀있기에 아쉽게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배를 타고 속초에 들어와야 한다.

    대륙과 단절된 반도의 남쪽은 사면이 막혀있는 섬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에 가는 것을 바다 바깥, 즉 “해외(海外)에 나간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반도는 근본적으로 대륙과 직접 통하는 곳이기에,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만주-시베리아를 횡단할 수 있다.
    죽어있던 [대륙으로의 갈망]이 되살아나고, 안중근백석이 넘나들었던 반도와 대륙의 경계선을 육로를 통해 넘어가 유라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지만 확신을 갖고 이런 예언을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자유통일 한반도는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을 잇는 새로운 교차점이자 가교(架橋)가 되리라.”

    하얼빈에는 벌써 겨울이 시작됐다.
    기념관을 나와 북만주의 매서운 바람과 눈발이 휘날리는 하얼빈 역전을 걸으며 이런 상상을 했다.


    (2014년 11월5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것을 필자가 다시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강규형(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수필춘추” 등단 수필가, 한국선진화포럼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