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법적 절차-자유민주주의 허물어지는 조짐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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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희원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국가안보법)


  • -글로벌 정보포럼 회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Duke University, IUPUI
    -검사(속초지청장),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장 역임

    저서(대한민국 우수학술도서 선정)
    -국가정보-법의 지배와 국가정보( 법률출판사)
    -정의로의 산책 (삼영사·2011)  
    -국제인권법 원론 (삼영사·2012)
    -국가정보학 요해 (법률츌판사·2011) 등 다수




    여론 재판에 짓밟힌 자유민주주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작전명 ‘폭풍’으로 남한에 대한 전면전쟁을 개시했다. 약 65년이 흐른 2014년 그날에 6·25전쟁과 자유민주주의를 되돌아볼 소중한 경험을 했다. 고(故) 이승만 대통령이 59년 설립한 원자력연구소와, 고 박정희 대통령이 70년 창설한 국방과학연구소를 견학할 수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한국표준형 원전을 개발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확보했으며, 이제 원전 수출까지 한다. 국방과학연구소는 현무, 해성, 신궁, 천궁, 백상어, 청상어, 홍상어, K2전차, K9자주포, K11복합형 소총, 견마로봇, 보라매 전투기 등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자주국방 무기 개발의 산실이자 군수품 수출의 터전이 되었다. 

      우리의 앞 세대들은 왜 이런 노력을 기울였는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함이다. 6·25전쟁 당시 국가 멸망의 위기에 내몰렸던 우리는 유엔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유를 지켜냈다. 하지만 이후에는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내야만 했다. 6·25전쟁이 남긴 교훈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Freedom is not free). 3년간의 전쟁은 260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북한 주민 약 300만 명은 공산주의를 탈출해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넘어왔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동족끼리의 처절한 전쟁에서 지켜진 것이다.

      북한은 남한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에 인민재판(人民裁判)으로 무수한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학살했다. 인민재판은 대중을 선동하여 처벌하는 숙청이다. 인민재판은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체제유지 수법으로 인민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의 기둥이다. 인민재판은 재판에 통일적 질서이어야 할 법은 적용되지도 않고 제도나 약속은 필요도 없다. 그저 선동자가 내세우는 것을 단죄의 기준으로 삼는다. 인민재판은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에서 유래한다. 마녀사냥을 정치학에서는 전체주의, 그리고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본다. 사회학적으로는 무차별적인 인권유린이다. 오늘날 진실의 여과장치도 없이 선동과 거짓을 신속하게 공유하는 인터넷과 SNS가 혹시 마녀사냥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고 마구잡이식 인격 살인의 물꼬를 터주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 ▲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2014년 6월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그런 불길한 징조를 보았다. 법으로 정한 국회 청문회에는 가보지도 못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장외 청문회가 바로 그것이다. 문 후보자의 능력이나 본질적인 사상은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법치는 실종되었고 개인의 자유는 종언을 알렸다는 사실이다. KBS가 문 후보의 교회 강연 가운데 일부 장면만 편집해 ‘친일파’ ‘식민사관’으로 몰고 갔으며 다른 언론들까지 가세해 여론 재판으로 그를 생매장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청문회라는 법적 절차는 쓰나미 같은 선동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현대사회 정의의 핵심인 절차적 정의는 난파되었다. 이런 사회가 6·25전쟁 당시 우리 앞 세대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민주주의 사회인지 의문이다.

     MIT 경제학과 교수인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는 그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인 제도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다고 결론 내렸다. 포용적 제도란 규칙과 법이 살아 있으며 올바른 기회를 보장하는 절차를 말한다. 포용적 체제는 사회분쟁이 제도화된 메커니즘과 수단에 따라 해결되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국가 실패론에 대입해 보면 우리 스스로가 적법 절차와 절차적 정의, 그리고 포용적 제도를 지켜내지 못함으로써 결국 대한민국의 실패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를 자아낸다. 언론과 정치권이 청문회를 무력화시키고, 여론 재판을 통해 문 총리 후보자를 뭇매질하는 동안 대통령을 비롯해 그 누구도 이를 막아주지 못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법적 절차와 자유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조짐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이 훼손당할 위험성은 더 커졌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근본인 자유민주주의 정체성부터 다시 한번 확실히 가다듬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진영논리나 세대·지역주의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행정부가 정치화되는 것은 금물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인물들이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개념을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고 글로벌적 사고에 유연한 인재들은 차고 넘친다.

     마지막으로 현장을 견학하는 내내 필자의 뇌리에는 국가 실패의 우려와 함께 또 하나의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외 청문회를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6·25전쟁마저 잊혀지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