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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末 명상>
“하느님은 알되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왜 고난을 주시는가?
이 의문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
신(神)을 원망하고 신을 버리고 신을 부정하는 사례가 생겼다.
하느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약성경의 욥이었다.그는 그러나 고난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심오하고 오묘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하느님의 방식은
선인(善人)에겐 다 보상해주고 악인(惡人)에겐 다 벌을 주는
단순 ‘인과응보’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선인도 때로는 고난을 맞게 되고, 악인도 때로는 당치도 않게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데는 우리가 미쳐 못보는
배후의 배후의 배후의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그래서 톨스토이는 “하느님은 알되 기다리신다”는 말로
이 역설(paradox)을 표현하려 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말년에야 그의 결백은 밝혀진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석방소식을 들으면서 숨을 거둔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무정하신가? 그 섭리는 아무도 모른다.
긴 시간이 흐른 연후에야 그 의미의 편린(片鱗)이 드러날 뿐이다.하느님은 왜 한민족에게 일제만행을 겪게 하셨으며,
왜 6. 25 남침이란 처참한 동족상쟁을 겪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오늘의 북한 동포들에게 저 끔찍한 기아(飢餓)와 고통의 수용소군도를 겪게 하실까? 도대체 왜, 왜, 왜?
선인에겐 선(善)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이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 아닌가?이 물음에 대해 욥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깨달음을 얻은 욥은, 하느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당장은 알 수 없어도
언젠가는 그 선(善)한 구원(救援)의 목적이
반드시 구현될 것임을 굳게 신뢰하고 소망하고 기다리자고 할 것이다.
톨스토이 역시 같은 대답일 것이다.
우리로 치면,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었지만
그로부터 35년 만에 8. 15 해방이 닥쳤듯 말이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아니, 하느님, 35년 암흑시대 끝에 다시 8. 15를 주시느니,
처음부터 아예 경술국치를 안 주시는 게 낫지 않나요?
하느님 심심해서 장난하시는 건가요?”
이 질문이야말로 기독교적 역사관과 구원(救援)사관의 진수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꿔서 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니, 하느님, 기껏 당신의 귀한 아드님을 보내서 덜컥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느니,
처음부터 아예 우지끈뚝딱 악을 멸(滅)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하느님 지금 괜히 복잡하게 영화 찍으시는 건가요?”기독교의 진리는 그러나, 청년 예수의 도전(挑戰)과 폭력수사(搜査)와 엉터리 재판과
공개처형과 부활이라는 최악의 수난을 거쳐 그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역설적인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계시(啓示)되었다.
키워드는, 예수의 일생 그대로 “고통(죽음)을 통해 환희(부활)로...”다.우리가 겪은 근, 현대사의 아픔과 영광도
이런 역설적 드라마의 기승전결(起承轉結)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도들에게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이걸 가지고 "뭐? 그래서 고통받아 싸다 이거지?"라는 식으로
거두절미(去頭絶尾)해서 왜곡하는 것은 신판 사화(士禍)가 될 것이다.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