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로고

한국인이 평등해진 건 李承晩의 농지개혁 덕분

입력 2014-04-09 18:45 | 수정 2014-04-10 10:47


한국인이 평등해진 건 李承晩의 농지개혁 덕분


金容三(전 월간조선 편집장)


▲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법 관련 내용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네이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농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농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 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6ㆍ25를 맞아 지가증권의 투매현상에 대해 조선일보(1981년 3월27일)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지가증권을 사면 돈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 시절의 부산시 광복동 길거리에는 지가증권을 사고 팔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별의 별 이름의 증권회사 간판들이 즐비하게 나붙었고 가죽가방을 들고 “증권 사려”를 외치고 다니면서 거두어들인 것들로 신흥 증권업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정부로부터 정식 증권회사 인가를 받은 증권업자는 대한증권주식회사 하나뿐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머지 그 많은 증권회사, 업자들은 모두 무면허 가짜 증권업자들이었던 것이다.>

삼양사의 김연수(金秊洙) 회장은 1950년대 초 울산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설립하면서 투자 대금의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조달했다.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은 동양맥주 불하 과정에서 34억원의 불하 가격 중 10%를 부친(박승직) 명의의 지가증권으로 납부했고, 나머지 대금도 액면가의 30%로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일부 충당했다. 선경직물의 창업자 최종건 회장도 선경직물 불하 과정에서 수원 지역 토착 지주인 차철순씨의 지가증권으로 매수 계약금 13만환을 지불했다. 또 한국화약 창업자 김종희 회장은 1951년 6월에 한국화약공판이란 회사를 불하 받는 과정에서 계약금의 일부인 1억원을 시중에서 싼값에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지가증권을 활용한 지주의 자본 전환 성공률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며 경제정책 입안과 시행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송인상(宋仁相)씨(효성그룹 고문)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농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해 지주ㆍ소작 제도가 아니라 농민이 그 땅을 소유한다는 원칙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만에서 보듯이 농지개혁에서 얻은 지주자본이 귀속재산 불하와 연결되어 공업자본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다.

농지개혁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연간 50%를 넘었다. 인플레 때문에 지주가 가지고 있던 지가증권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결과 산업자본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 자본이 공업자본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자본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 격이 김각중(金珏中) 전 전경련 회장(주식회사 경방 회장)이다.   

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 근대식 방직공장이 들어온 것이 1850년대. 그 후 일본은 산업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이 겪은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며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즉 방직업에서 기계산업, 중화학공업 등으로 이행한 결과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세계적인 공업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그들은 산업화에 대한 100여 년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진이 그대로 남았으며, 대규모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경영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본만 뒷받침될 경우 손쉽게 전후(戰後)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전주 지방에서 120정보를 소유하고 있던 이부영(李富榮)씨를 비롯한 지주들의 전주방직 실패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부영씨를 비롯한 전주 지방의 대지주 5명은 지가증권의 3분의 2씩을 투자하여 방직공장을 불하 받고 실무는 일제 때 근무했던 종업원들을 모아 그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근대적인 회사 경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지주들에겐 예기치 않았던 부담이 뒤따랐다. 공장을 인수하여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하자금 외에 운전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5명의 지주들은 다시 돈을 모아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운영자금 외에도 상당한 부담이 뒤따랐다. 결국 회사 운영을 포기하고 삼양사에 공장을 넘기고 말았다. 사업에 뛰어든 지 불과 1년만에 다섯 명의 지주는 지가증권을 다 날리고 빚만 잔뜩 지게 됐다. 이런 사례는 당시 우리 나라 지도층들이 산업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시키는 일반적 사례일 것이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시행된 농지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차원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노출된 것은 예기치 못한 전쟁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도 소득 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래를 찾기 힘들다고 평한다. 그 뿌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동아시아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한 일본, 한국, 대만은 중산층이 두텁게 자리잡아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됨은 물론 사회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 반면, 남미(南美) 여러 나라들은 농지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극단적인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된 것을 비교하면 그 뚜렷한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졌던 반상(班常)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고,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貧者)의 격차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 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풍토가 훗날 한국인을 상징하는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의욕과 참여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김용삼 /전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
  링컨의 노예해방보다 더 위대한 李承晩의 농지개혁
 
  孫世一 선생, 농지개혁 과정을 자세히 파헤치다.

趙成豪(조갑제닷컴)
  
한국 근대화의 礎石(초석)을 마련한 農地(농지)개혁과 미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된 노예해방선언과 改憲은 이승만과 링컨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결단에 의해 단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과정 또한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농지개혁은 地主(지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利害(이해)관계가 얽혀 심의와 결렬이 수 차례나 반복되는 난항을 겪었다. 노예해방 조치 역시 南北전쟁과 공화당 내 ‘급진파’의 반대가 맞물리는 등 여러 정치적 악조건 속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註)
    ----------------------------------------  
농지개혁법 立法(입법) 과정은 孫世一(손세일, 前 국회의원) 씨가 매월 <월간조선>에 기고하고 있는 評傳(평전)인 ‘李承晩과 金九’에 잘 나와 있다. 곧 完刊(완간)을 앞두고 있는 이 評傳은, 孫 씨가 2001년 8월부터 현재까지 12년 동안 연재해 오고 있다. 그의 글에는 私見(사견)이 없고, 정밀한 조사를 통해 발굴된 역사적 사실이 담겨있다. 따라서 사안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同 잡지 2013년 3월호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농지개혁법 立法 과정을 정리해 보았다. 
    
曺奉岩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이승만의 布石
 
농지개혁은 한국의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사건으로, 李承晩(이승만) 前 대통령(이하 이승만)의 주도로 이뤄졌다. 농지개혁의 목적은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고 ▲地主(지주)는 산업 자본가로 육성해 궁극적으로 농업과 공업을 竝行(병행)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군정법령 제33호(‘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의 취득에 관한 건’)가 공포되면서 일본인의 개인재산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계 회사의 재산이 美군정 산하의 ‘신한공사’로 몰수·이관되었다. 1948년 美군정은 다시 군정법령 제173호(‘귀속농지매각령’)와 제174호(‘신한공사해산령’)을 공포했다. 2町步(정보, 땅의 넓이가 町으로 끝이 나고 끝수가 없을 때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1정보는 약 3,000평에 해당) 미만의 상한을 두고 해당 귀속농지(일본인 소유였던 농지)의 신한공사 소작농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는 조치를 담고 있었다.

이승만은 美군정의 農地불하를 못마땅해 했다. 이승만의 對美(대미) 창구 역할을 맡은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農地불하는 건국 이후 우리가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할 일’이라는 취지의 항의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 장관에 ‘공산주의자’ 출신이었던 曺奉岩(조봉암)을 임명했다. 이는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다. 그가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前歷(전력)이 있어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실시하려고 한 이유 중 하나는 국민들에게 反共(반공)정신을 일깨워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는 尹永善(윤영선) 前 농림부 장관의 회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산당 막기 위해서라도 농지개혁 해야
 
<대통령은 전쟁 수행으로 다른 일을 돌볼 틈이 없었지만 농지개혁만은 예외여서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당을 막으려면 농지개혁을 빨리 해야 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도 개혁을 서두른 것은 농지개혁은 공산당만 할 수 있다는 선동을 봉쇄해 영세소작인의 반공정신을 일깨우는 것, 피란지주의 생계를 돕는 것, 그리고 군량미 조달의 뜻이 있었다.> (<중앙일보> 1982년 5월3일자, ‘中央廳(16)―農地改革⑤’)

북한의 경우 1946년 3월 우리보다 먼저 농지개혁을 했다. 北의 ‘토지개혁법령’ 제5조에는 “몰수한 토지 전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영원히 양여한다”라고 했지만 제10조에는 “농민에게 분여된 토지는 매매치 못하고, 소작 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이는 농민들에게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준 것으로 강제 국유화이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의 취지를 설명하며 자본가들을 없애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책이 우리와 다른 한 가지는 소위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토지분배로 모든 금융과 각종 재산을 다 평균히 분배해 자본가를 없애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본가가 있어야 경제가 유통되어 민중이 다 살 수 있다. 우리나라가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자족자급할 능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그에 비해 토지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출만 가지고는 민중이 먹고살 것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애고 노동자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地主 출신 의원들의 반발
 
이승만의 농지개혁 의지가 확고해지자 농림부는 1948년 9월30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하지만 참고자료의 빈약, 각종 통계의 정확성 결여 등으로 농촌 자체에서 이를 직접 확인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농지개혁 단행 소식이 알려지자, 농촌 사회에서는 地主들의 농지放賣(방매)행위가 문제화됐다. 地主들이 농민들에게 半강제적으로 농지를 강매하는 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던 것이다. 11월22일에 긴급소집되었던 各道(각도) 농업경제과장회의에서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농림부는 ‘농지 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이하 임시조치법)’을 마련, 국회의원 91명의 서명을 얻어 국회에 제출했다. 법안 내용은 3개조로 된 간단한 것이었다.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
  제1조 농지개혁을 원활히 실시하기 위하여 일반농지에 대하여 다음 처분 행위를 일체 금지한다.
  1. 소작권의 이동
  2. 소작권의 박탈
  제2조 전조의 규정에 위반하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부칙
  제3조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이 법안은 12월7일에 국회에 제출되어 산업위원회(산업위)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地主 출신 국회의원이 많은 산업위는 ‘곧 농지개혁법이 제정될 텐데 임시조치법까지 제정할 필요가 있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벌인 끝에 1949년 2월4일, 농림부 주도로 농지개혁법 초안을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기획처가 일부 수정한 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는데, 수정된 정부안은 통칭 ‘기획처案’으로 불렸다. 정부는 2월5일 이 ‘기획처案’을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이와 별도로 산업위가 마련한 ‘산업위案’이 3월10일 본회의에 상정시켰다.

결국 농지개혁법안은 기획처案과 산업위案이 국회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두 개의 案이 가진 차이 때문에 국회 審議(심의)에만 석 달이 소요됐으며, 의원들간에도 견해 차가 표출되었다. 산업위案의 경우, 의사일정까지 변경해 기습상정한 것이라 정부 측의 반발도 컸다.
    
농민들의 부담을 우려한 이승만
 
국회 산업위案은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우선 地主들에 대한 보상地價(지가)가 농림부案의 두 배인 300%이고, 그것을 해마다 30%씩 10년 동안 상환토록 하되, 自營(자영)을 인정하여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최초의 농림부案은 농민들의 地價상환율을 평년작 생산고의 120%로 하고 매년 20%씩 6년 동안 상환하도록 했다. 산업위案은 농림부案에 비해 농민들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농민을 대표하던 ‘대한농민총연맹(이하 農總)’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農總은 3월14일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가 農總의 토지개혁안, 농림부案, 심지어는 기획처案까지도 묵살하고 지주를 위한 산업위원회案을 한사코 통과시키려는 反민주적 행위에 대하여 우리 農總은 義憤(의분)을 금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승만도 내심 農總과 뜻을 같이 했다. 그는 1948년 9월 施政(시정)연설에서 “항상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의 염원”이라며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시급한 대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농지放賣행위를 일삼는 惡德(악덕)지주들의 행위에 대해선 철저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국회가 기획처案을 무시하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기습상정한 것도 불쾌히 여겼다. 그는 申翼熙(신익희) 국회의장에게 편지를 썼다.

<농지개혁법 법령이 발포되기 전에 우선 급한 것은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농지매매라는 명목 하에 강제로 토지를 매도시켜 개혁법을 피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속히 방지하지 못하면 법령이 발포된 후에라도 그 진행 방법에 지장이 많을 것이다. 이미 상정보류 중에 있는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을 속히 통과시키면 이러한 모든 폐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니 同 법안이 속결되기를 바란다.>

이승만은 地主들의 半강제적인 농지매매를 방지하고자 정부가 마련한 임시조치법만이라도 조속히 통과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 임시조치법에 대한 표결 결과는 在席(재석) 155명 가운데 可 55표, 否 22표로 부결되었다.

서상일 국회 산업위원장은 ‘국회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며 地主에 대한 보상地價 300%가 결코 많지 않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200만 농가에 대해서 토지를 분배하려면 한 집에 1町步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남은 戶數(호수)는 다 실업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도시의 경우 많은 기업과 산업을 발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3町步로 균등히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45만원밖에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는 농가에서 아이들을 소학교에 보낼락 말락할 것이요, 중등학교까지는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300%가 많다 적다는 말이 있지만 지주에게 있어서 300%는 많지 않으며 비싼 것이 아니다.> (《制憲國會速記錄(4)》,제2회 제52호(1949.3.12), p.36~37)
    
표류하는 농지개혁법
 
소장파를 비롯한 무소속 의원들도 산업위案의 수정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3월15일 연석회의를 열고, ▲농지대금을 최고 100%로 有償(유상)매상하여 無償(무상) 분배할 것 ▲농지대금은 최고 100%로 유상 매상하여 유상 분배하되 상환 기한은 5년으로 均分(균분)할 것 ▲농지대금은 최고 100%로 遞減(체감) 매상(단, 大地主의 토지는 50%로 정도로 매상)하여 120%로 유상분배하되 5년간 균분할 것 등 세 가지 案에 합의했다.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마련한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다.

그 와중에 농지개혁법 명칭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몇몇 의원들이 ‘농지제한법’, ‘농지법’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 역시 표결에 부쳐졌는데 在席 130명 가운데 可 103표, 否 4표로 원래 명칭인 ‘농지개혁법’으로 가결되었다.

이후에도 농지개혁법은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국민회 소속 황호현 의원 외 11명은 농지개혁법에 임시조치법안을 포함시키자는 취지의 수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들은 ‘농지개혁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소작 주는 농지를 自耕(자경)할 수 없는 자의 농지와 本法(본법)이 규정하는 한도를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는 소작권 이전 및 일체의 처분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의 신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산업위案 지지자들은 기존의 농지개혁법이 실행되면 필요없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 제의도 두 차례의 표결 끝에 결국 부결되었다. 地主들의 放賣를 방지하기 위한 이 조항은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가까스로 附則(부칙) 27조에 포함된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地主들에 대한 보상률은 4월25일 열린 정기국회 84차 본회의에서 심의되었다. 200%, 150%, 125%, 120%, 100% 등 총 다섯 개의 수정안이 제안되었으며, 산업위안의 300%까지 합치면 총 여섯 개에 달했다. 100%, 120%案은 표결 끝에 부결되었고 150%案이 가결되었다. 3월15일 합의했던 소장파와 무소속 의원들의 의견통일이 확인된 셈이었다. 반면, 서상일 산업위원장은 否票(부표)를 던졌다. 地主들의 地價보상문제가 150%로 결정되자 농지개혁법 처리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법안 자체가 가진 모순 때문에 또 다시 논란 일어
 
국회는 4월26~27일 제7조2항부터 부칙 28조까지 심의를 마치고 5월2일 최종확정된 농지개혁법을 정부에 이송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법안이 급박하게 처리되어 그대로 시행할 수 없는 모순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과수원, 종묘포, 뽕밭 등 다년생 식물 재배농지는 제8조 제4호 규정에서는 소유한도를 3町步로 하고 그 이상은 매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제6조 제2항 규정에는 다년생 식물 재배농지는 무제한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5월9일 국무회의를 열고 농지개혁법을 국회에 환송하기로 의결한다. 당시 국회가 閉會(폐회) 상태였기 때문에 정부는 5월16일 ‘消滅通告(소멸통고)’ 형식으로 국회에 보냈다. 이는 5월21일 열린 임시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다. 농지개혁법에 대한 정부의 消滅通告가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李範奭(이범석) 국무총리는 농지개혁법의 일부 규정은 사실상 시행이 곤란하므로 이에 대한 수정을 위한 것이라며 환송에 대한 정부 측 입장을 전했다. 결국 국회는 농지개혁법을 원래 법안대로 정부에 再이송했고, 정부는 그것을 6월21일 법률 제31호로 공표해버렸다. 
    
6·25전쟁의 勝因(승인)이 된 농지개혁
 
7월1일 이승만은 국회에서 농지개혁법 일부 조항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지주들의 장래 생활방도와 또는 정부에서 많은 부담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므로 정부에서 약간의 개정안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7월7일 정부는 농지개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이 개정안은 해를 넘긴 1950년 2월2일에야 비로소 국회를 통과했으며 시행령은 同年 3월25일 공포되었다. 6·25전쟁을 불과 3개월 앞두고 그 빛을 본 셈이다.

이승만은 1949년 4월30일 국회 폐회식에서 농지개혁법안의 최종審議가 확정된 것을 크게 반겼다. 그는 “공산분자가 전국을 파괴하려고 할 때에 제일 많은 민중의 힘을 얻어서 하려는 게 농토개혁 문제”라며 “이것이 만일 통과되지 못했으면 波動(파동)도 다소 있었을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地主들에 대한 위로의 말도 건넸다.

<물론 토지 주는 데 대해서 우리가 지주들이 좀 억울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내가 서울에 있었으면 그동안에 여러분에게 다시 말씀이라도 해서 지주들에게 과히 서운하게 하지 말라는 말을 했을는지 모르는데, 나 보기까지에는 과히 그렇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만치 통과된 것을 여러분께 치하합니다.> (《制憲國會速記錄(4)》, 제2회 폐회식(1949.4.30), p.832)

이승만의 과단성 있는 농지개혁 덕분에 6·25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북한의 경우, 토지를 국가가 몰수해 경작권만 부여했으므로 일반 소작농들은 토지를 마음대로 소유할 권리가 없었다. 黨이 모든 것을 소유·관리하는 것으로 사실상 몰수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주도로 국회에서의 치열한 논의 끝에 민주적 방법으로 농지개혁을 단행, 地主와 농민 모두 큰 불만없이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할 수 있었다. 즉,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과 地主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체제 경쟁에서 북한보다 우위를 점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굳혀졌다.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는 데 성공한 것이다. 與村野都(여촌야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농민표는 선거 때마다 여당 지지였고, 이것이 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李 대통령이 농민들을 체제수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던진 승부수가 농지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은 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을 해방시키고, 공산주의를 막고, 산업화를 앞당기는 1石3鳥의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 李 대통령은 이렇게 어려운 개혁을 국회를 통하여, 즉 민주적으로 하였다. 그런 점에서 링컨의 흑인노예 해방에 버금 가는 위대한 근대화 개혁이었다. 필리핀과 파키스탄은 아직도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여 후진 사회의 질곡에 머물러 있고, 북한정권은 국가가 농지를 독점, 생산성을 망가뜨림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다.

농지개혁은 일종의 農奴해방이었다.

뉴데일리 댓글 운영정책

뉴데일리 경제

대전·충청·세종

메인페이지가 로드됩니다.

로고

뉴데일리TV

칼럼

제약·의료·바이오

선진 한국의 내일을 여는 모임. 한국 선진화 포럼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