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다! 내 새끼... 어떻게 애비들 뜻을 그렇게 잘 아누...”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어려도 알건 다 안다. 이 넘아!”
<오늘 같은 옛날 얘기>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옛날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마한 동네가 있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동네지만, 동네 이장을 누가 하느냐를 놓고 매일 싸움질을 했다.
특히 가문 괜찮은 두 집안은 오래 전부터 으르렁거렸다.
한 집안은 그 집 주인이 과거 오랫동안 여러 번 이장을 해왔고, 다른 집안은 두어 번 해 봤다.
두어 번 이장을 낸 그 집안은 언제부터인지 동구 밖의 냄새나는 돼지 새끼들과 친해져서
동네사람들 중에 거리를 두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이장을 뽑는 시험이 치러졌다.
물론 두 집안에서 공부 잘한다는 두 사람이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결과, 여러 번 이장을 해먹던 집안 맏딸은 52점을 받았고,
돼지 새끼들과 친한 집안의 큰 아들은 48점 밖에 못 얻었다.
결국 그 집안 맏딸이 동네 이장을 맡게 됐는데,
다른 집안 큰 아들은 너무 억울해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3점만 더 받았으면, 이장은 내 껀데...”
집안에서도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동네 사람들 중 하나가
‘동네 이장이 된 그 집안 딸이 합격된 것은 동사무소 직원이 조직적으로 그 집 딸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소리를 치고 다녔다. 동사무소 직원이 그 집 딸이 지나갈 때 마다 시험 잘 치루라고 웃음을 머금은 채 살며시 ‘화이팅’을 외쳤다며, 그래서 시험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장이 된 그 집 딸은 “나는 동사무소 직원이 웃었는지도 모르겠고, 파이팅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고 주장하는 거 아닌가. 시험에 떨어진 큰 아들과 집안에게는 진짜 열 불나는 일이었다.
이장 시험에서 미끄러진 그 집안의 큰 아들은 “이번 시험은 무효!”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자기가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마당에 괜히 밑천이 드러날 거 같기도 하고,
특히 같이 시험을 치루겠다고 징징거리는 배 다른 동생(‘새대가리’에 ‘깡통’이라지만 벌어 논 돈은 꽤 많았다)까지 내치고 대표 선수로 치룬 시험인데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다음 번 이장 시험을 위해 재수라도 해야 할 판인데 시험이 무효라고 외치면
동네사람들이 “아예 다시는 시험 칠 생각 말라!”고 할 거 같아서 속만 끓이고 있었다.
물론 집안에서는 날마다 난리가 났다.
나이 든 식구들 끼리 모이기만 하면 “어떻게 시험을 앞두고 동사무소 직원이 실실 쪼개고 다닐 수 있느냐. 그것도 몇 천 번씩이나.”, “파이팅은 또 뭐냐.”, “이번 시험은 무효다. 다시 치러야 한다.”, “다음 번 시험을 위해서도 무효라고 얘기하는 게 맞다.”고 쑤근쑤근 거렸다.
그러니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동네 창피는 면하기 위해
“집안에서 한 얘기는 절대 밖에 나가서 하면 안 된다.”고 입단속을 계속 했다.
물론 가끔은 집안사람들 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번 시험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다시 치루는 게 맞는 거 아냐?”라고 씩씩하게 나대는 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웬 양아치 같은 애들만 초저녁에 모여 불장난하면서
박수를 보내니 열통이 터질 일이 아닌가.
그러던 중 드디어 동네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 동안 동구 밖 돼지를 항상 보살피던 무당들이 들고 일어났다.
“동구 밖 돼지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돼지들에게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외치면서,
“이번 이장 시험은 무효다. 동네 이장이 된 그 집안 맏딸은 물러나야 한다. 그 애비는 칼을 휘둘러 이장이 됐었다.”고 외쳐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하지만 그 무당들이 “돼지” 편을 노골적으로 들면 곤란한데... 사정이 이러하니 결국 그 집안에서는 “돼지 얘기만 빼면 모두 맞는다.”고 한 소리했다. 웬 걸 그래도 동네 사람들의 눈치가 이상하네... 그런데도 그 집안 큰 아들, 무당들의 외침에 드디어 힘을 얻어
그 무당들을 데려다 동네 한 복판에서 굿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좀 아쉽고 자기 성에는 안차지만 “돼지 얘기”는 빼고, 또 그 집안 맏딸 물러나라고는 못한 채 어물어물...
“이장 시험 과정에서 동사무소 직원들의 응원은 문제가 있었다.” 정도로...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아 글쎄 그렇게 입단속을 했는데, 그 집 막내딸이 나서서 집안에서 어른들이 계속했던 말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죄다 해 버렸네... 원래 그 집안에서는 그 어린 딸이 하도 가상해서 양녀로 들였었다. 집안과 친한 동구 밖 돼지들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뛰어 다니는 것이 너무도 이뻐서 말이다. “나는 이번 이장 시험이 무효라고 생각한다. 시험에 합격한 저 집안 맏딸은 당연히 불합격자다. 내년 수능 때 다시 이장 시험 치러야 한다!” 동네 사람들은 뜨악해 하면서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저러나?”며, “버릇없는 그 애를 따끔하게 벌 줘야 한다.”, 심지어는 “그 집안에서 내 쫓아야 하는 거 아니냐.” 등등 입방아를 찧어 댔다.
그러자 큰일 났다 싶은 그 집안 집사를 맡고 있는 어른이 동네 사람들 앞에서 막내딸에게 야단을 쳤다. 한 쪽 눈을 질끈 감고 밉지 않은 표정으로, 하지만 꿀밤이라도 줄듯이... “집안 얘기를 밖에서 그렇게 눈치 없이 해 대면 어쩐다냐!”...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애가 어려서 뭘 모르고 그랬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서둘러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문 문턱을 넘어서자 굳은 표정을 풀고, 막내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시는 말씀.
“장하다! 장하다! 내 새끼... 어떻게 애비들 뜻을 그렇게 잘 아누...” 그리고는 누구에게 들으라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대문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어려도 알 건 다 안다. 이 눔들아!!”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