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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7분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 묘소.
진혼 나팔소리가 울리자 '꽝'하는 천지가 뒤집힐듯한 굉음과 함께 아웅산 묘소의 목조 건물이 한꺼번에 붕괴됐다.
"끔찍한 테러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30년 전 아웅산 폭탄테러 때 장·차관급 공식 수행원 18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기백(82) 전 국방부 장관은 7일 오후 자택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대통령을 수행한 이 전 장관도 머리와 배에 파편이 박히고 다리가 서까래에 깔려 크게 다쳤지만, 그의 부관이 추가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
이 전 장관의 목숨을 구한 부관은 현재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의 한국군 수석대표인 전인범(55) 육군 소장이다.
이 전 장관은 북한이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이유에 대해 "북한은 김정일 세습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김정일 우상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며 "인민들이 김정일을 추앙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시도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는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다"며 "비동맹 외교의 일환으로 (우리가) 미얀마를 방문했는데 외교적으로 열세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진 북한이 테러를 감행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많은 인재들이 희생된 것이 마음이 아프다"면서 "그들이 순직하지 않았다면 경제발전과 외교적 지위향상에 더욱 기여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전 장관은 매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그는 미얀마 현지 추모비 건립을 추진 중인 '아웅산 순국 사절 추모비 건립위원회'의 고문도 맡고 있다.
이 전 장관은 "아웅산 테러와 같은 북한의 만행에 대해 자료를 수집해서 국민 교육에 활용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한다"면서 "계속 북한에 압력을 가하고 대응했으면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도발과 같은 만행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웅산 테러가 잊혀지는 것이 가장 한스럽다"면서 "동서고금의 유례가 없는 만행을 상기하는 시설이 현지에 전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현지 추모비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