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선 국군포로 자식이라 아무 것도 못해… "괄시하고 원망만"한국 와보니… "참 자랑스러워, 온 국민들에 자랑하고 싶다"아버지 유해, 中으로 반출… "정부, 국내로 꼭 송환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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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탈북자 손명화 탈북민복지연합회장 ⓒ 물망초 제공
    ▲ 탈북자 손명화 탈북민복지연합회장 ⓒ 물망초 제공

     

     "올해 3월부터 노력하던 끝에
    지난 9월 10일 새벽 2시,
    아버지 유해를 (중국으로) 모셔오게 됐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 품엔 오지 못하고 있다."


    탈북자 손명화 탈북민복지연합회장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27일 열린
    [탈북 국군포로 초청 간담회]에 참석,
    말을 마친 손 씨는
    "내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노래"라며
    <그리운 내 고향 사모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 북한에 있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것을
    손 씨가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포기해라.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난 [왜 할 수 없는 것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내가 국군포로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국군포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손 씨는 꿈과 행복을 빼앗긴 채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보원에 해당)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매는 다 맞은 것 같다.

    보위부원들이
    다 죽은 상태의 나를 물건짝처럼 기차에 올려 실을 땐
    인간으로 태어난 게 한스러웠다."


    아버지를 괄시하고 원망했고,
    아버지에게 못할 말도 많이 했다.

    "왜 포로가 됐느냐.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느냐.
    어째서 자식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느냐."

     

    손 씨의 아버지는
    임종 직전 손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국군 포로라는 것은 너만 알고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형제들이)
    아버지를 또 원망한다.]


    그러면서 군번 및 형제 이름 등을 모두 알려주며
    다음과 같은 유언도 남겼다.



    [너라도 고향에 가봐라. 살기 좋은 곳이다.
    만약 네가 아버지 고향에 간다면,
    아버지 시체를 꼭 매고 아버지 고향에 묻어달라.]

     

    아버지에게 못할 말을 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들은 손 씨.

    우여곡절 끝에 탈북에 성공해
    2006년 한국으로 입국한 손 씨.

    한국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나라였고,
    북한 사회가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괄시하고 천대했던 게

    부끄러워졌고,

    국군포로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손 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지난 9월 10일 새벽 2시
    [아버지의 유해]
    중국으로 운반해 올 수 있었다.

    "추석 전
    고향 땅에
    시신을 모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손 씨는
    "정부가
    아버지의 유해를 못 모셔오고 있는데
    안타깝다
    "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아버지를 버리고 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믿을 것은 정부 뿐.
    손 씨는 정부에 유해 송환에 협조해 달라고 호소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침승처럼 살았다.

    한국에 와보니
    우리 아버지는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란 것을 알게 됐다.

    온 국민들 앞에
    [내 아버지는 영웅이었고 대한의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정부가
    아버지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

     

    #. <그리운 내 고향 사모곡>을 연주한 손 씨는 
    이어 <심장에 남는 사람>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슬픔을 삼킨 그의
    바이올린 선율은 

    마치 그가 애타게 노래를 부르는 듯해
    가사가 저절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아~ 그런 사람 나는 못잊어."
       - <심장 속에 남는 사람> 가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