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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힌 한(恨)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6.25 국군포로가족회 유영복 명예회장은
수십 년도 더 된 오래된 기억을 되새겼다."올해는 알다시피
(정전 협정으로) 휴전 60년 해다.지난 날 우리가 최전방에서 싸운
그 때가 떠오른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27일 열린
[탈북 국군포로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서다.[이미 1년여 전에도
같은 자리에서 했던 그 얘기]를
그는 또박또박 이어나갔다."23살이었다.
마지막 임무는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정찰하는
잠복 근무였다.1953년 6월 10일
마지막으로 중공군이 총공세를 할 무렵이었다.100% 돌아올 수 없는 임무였지만,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이
출동했다."
휴전협정 불과 42일 전,
결국 그는 북한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았다."대한민국 정부가 있고,
대통령이 있는데 모른 척 할까.
[반드시 우리를 찾으러 올 날이 있겠지]하고 생각했다.북한도
다 부려먹고 나면 보내주지 않겠는가.
설마 수십년 부려먹을까."
그렇게 북한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수십 년을 지냈고,
결국 1990년대 60세가 돼서야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조국 땅에 가야겠는데,
기회가 없었다.탈출 밖에 없었지만
실수하면 개죽음을 당하고,
국군포로 아버지 때문에 천대받던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갈까
다 데려가긴 힘들고,
죽으나사나 (조국 땅에) 가야겠는데…."
김일성이 죽은 해인 1994년
그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그간 아내가 항상 했던 말은
"당신이라도 살아서 남쪽 친척들을 찾아가라"는 것.또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000년대 들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악수하는 것을 보고
유영복 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 대통령이 해결해주겠구나."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총탄이 빗발치는 곳으로 간 [전쟁 영웅]을
대통령이 외면한 것이다.유영복 씨는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이렇게 말해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고 한다."여보쇼, 전쟁이 났고,
2000년대 반세기만에 만났는데
그럼 화해를 해야할 것 아닌가.국군포로 다 부려먹지 않았느냐.
불과 몇 명 살아있다는데
늙은 분들이
이제 다시 북한 쳐들어오겠느냐.돌려보내달라.
그리고 당신들에게 지원해주겠다.
당신들의 애국자(비전향장기수) 다 돌려주겠다."끝으로 그는
이날
"처음으로 무공훈장을 달고 나왔다"며
훈장을 준 사단장의 말을 전했다.[당신이
6.25 전쟁 때
잠복 근무를 섰던 임무를 알기에
이 무공훈장을 드립니다.]그리고선 훈장이 보이게끔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의 눈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난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군인이 포로가 된 것은
명예도 자랑도 아니다.그저 죽으나 사나
조국으로 돌아가
본분도 지키고 내 명예도 찾고,
마지막 여생을 대한민국에서 보내는 것이
소망이었다.(탈북 국군포로)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목숨을 걸고,
가족 희생을 무릎쓰고
넘어왔다.
가슴 아픈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