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행위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인 물질적 변수와 관념적 변수 사이의 교차점은 국가가 아닌, 인간 정책결정자다."

    외교정책 분석에서 최근 정책결정자 개인차원의 연구방법이 각광받고 있다. 이 연구방법으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대미외교'를 언론인 남시욱씨(세종대 석좌교수)가 분석했다.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18회 이승만포럼'이 9일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남시욱씨는 "냉전이 끝나는 1990년대 초부터 외교정책에 대한 연구방법으로 정책결정자 개인에 대한 분석을 중요시하는 접근방법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며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이승만 개인외교를 분석했다"고 발표의 요지를 분명히 했다.

     이승만 박사는 열강의 한반도 쟁탈전이 벌어지던 격동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는 '약소국은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강력한 철학을 형성했다.

    남시욱씨는 1898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기간에 전개된 대한민국의 외교에 이승만 개인의 철학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발표를 통해 전달했다.

    다음은 발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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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회 이승만포럼>
    2012. 8. 9(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의 대미 자주외교

    남시욱(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1. 이승만 대미외교의 분석 필요성과 방법 

    본고는 최근 들어 외교정책 분석(Foreign Policy Analysis, FPA)에서 중요시되고 있는 정책결정자 개인차원의 연구방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대미외교를 분석해 보려 한다. FPA에서 국제구조나 국가가 아닌, 정책결정자 개인에 대한 접근방식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후였다.

    정책결정자 개인에 대한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의 관념(idea) 문제이다. 정책결정자의 관념은 외교정책의 이정표(road map), 초점(focal point)의 설정, 그리고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의 과정을 통해 외교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관념의 유형으로 정책결정자의 세계관(world view), 원칙적 신념(principle belief), 그리고 인과적 신념(causal belief)이 중요하다.

    국가행위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인 물질적 변수와 관념적 변수 사이의 교차점은 국가가 아닌, 인간 정책결정자이다. 만약 국제관계이론(International Relations, IR)에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국제관계에 있어서 변화, 창의성, 설득, 그리고 책임문제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냉전시기에 주류 국제관계이론들은 인간을 이론적인 혼합점에 위치시킨 적이 없었다.

    이제 IR의 주류이론들도 입장을 바꾸어 인간을 중요시하기 시작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점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점들은 ①여러 수준의 분석을 의미 있게 통합할 수 있고, ②주체-구조의 문제에서 나타나듯이 주체성의 개념을 IR이론에 결합시킬 수 있고, ③FPA와 IR에서 인간의 역할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고, ④IR과 비교정치나 공공정책연구 분야를 잇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점이다.

    이 같은 분석방식에 따라 우리는 이승만의 세계관과 신념, 그리고 이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인성과 태도, 경험과 심리, 기억과 감정, 그가 속한 소집단의 역할, 국내정치, 문화적・사회적 요인, 한국이라는 국가의 속성, 그리고 국제체제적 영향 등 다양한 측면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냉전 종식과 동시에 국제정치학 분야에 등장한 또 다른 새로운 이론이 구성주의 이론이다. 구성주의란 국제질서가 개별 국가들의 주체적인 행위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국제체제를 고정불변의 상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공산권이 갑자기 붕괴하자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당시의 지배적인 이론이던 신현실주의 이론이 구성주의 이론의 도전을 받았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강대국중심의 국제질서의 변경을 위해 과감하게 도전한 이승만의 적극외교방식은 새로운 조명을 받을 시기가 되었다. 

    2. 이승만의 대미정책 형성과정

    1) 배재학당-한성감옥 시기의 교육과 독서

    이승만의 외교사상과 외교스타일의 형성에는 배제학당에서의 신식교육과 독립협회 활동 및 엄청난 양의 독서활동을 한 한성감옥 시절을 합한 모두 10년간(1895〜1904)의 청년기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이 기간에 그의 기본적인 국가관 세계관 문명관 등이 대체로 형성되었다. 물론 한반도 주변국들과 그의 외교에 대한 인식의  골격도 이때 이룩되었다. 그 후의 미국유학과 미국에서의 경험은 이러한 그의 인식과 사고를 더욱 이론화하고 보강하는데 기여했다. 

    이승만은 배제학당에서 ‘영어 이상’의 지식을 습득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다닌 2년간(1895〜97) 수업시간에 미국의 정치제도를 배우고 마음속에서 일종의 ‘혁명’ 같은 감동이 일어났다 한다. 그는 졸업식에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영어연설을 할 만큼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젊은 22세의 청년으로서 국가의 장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배제학당을 나온 후 약 2년간(1897〜98) 학생주간지 <협성회보>와 <매일신문>, 그리고 <뎨국신문>을 차례로 창간하여 언론활동을 하는 동시에 독립협회의 젊은 급진파로 활동했다. 그는 개화파 선배가 주창하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평생 동안 그의 정치와 외교정책의 나침판 구실을 했다. 당시 개화파들의 이 같은 목표는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신문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편벽되지 않는 외교’, 즉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외교를 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외교를 편벽 되지 않게 해야 세계 각국이 대한정부를 다만 대접 할뿐이 아니라 우러러 보도록 하여야 할터인데 만일 이 목젹을 잊어 버리고 외국이 상관 아니 한다고 자주 독립권을 구습 시 하는데 쓰고 나라에 유지하는 일을 하는데는 자주 독립권을 쓰지 아니 할 것 같으면 첫째는 남에게 욕과 부그러움을 받는 것은 말 말고라도 외국들이 오래 그 자주 독립권을 대한이 가지고 있게 아니 할지라.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를 주최하면서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 반대운동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감은 이 때부터 확고해졌다. 이승만은 이 기간 중 잠시 동안(1898.11〜12) 조선왕조 시대에 얻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벼슬인 중추원 의관(議官)으로 재임하다가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이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는 그 후에도 꺾이지 않고 정치개혁운동을 계속했다. 

    이승만은 고종의 양위와 박영효 총리 추대운동을 벌인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한성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그의 5년 7월 동안(1899.1〜1904.8)의 감옥 생활은 그에게 있어서 엄청난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동시에 수감 1년 뒤(1900년 2월)부터 출옥 때까지 감옥 안에서 독서와 집필이 허락되어 방대한 양의 책들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그는 수감된 후 석방 전년까지 <뎨국신문〉및〈신학월보〉에 기고활동을 계속하면서 많은 책들을 번역도 하고 영한사전도 편찬했다. 한성감옥에서의 초기저술인 <옥중잡기> 가운데는 그의 외교사상이 담긴 것이 있다. 그 중 “한인지승전차”(韓人之乘電車)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세상에서 통상하고 수호하는 까닭은 어느 한 두 강국만이 이익을 독점하고 기회를 포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만방과 만인이 이익을 같이하고 우호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어찌 한국만이 홀로 향우지탄(向隅之嘆)을 지닌 채 쇠미하고 궁핍하여 그 폐해를 무두 받아서 오늘날과 같은 극한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는가?

    그는 또한 “러시아의 남하 경고와 개신교・신학문 권장론”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러시아에 대한 분노가 섞인 글이다.

    기나긴 밤처럼 어두움에 빠져있는 지나(支那)와 쇠약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한(大韓)이, 누차 세상사람들이 깨우치고 경고한 것처럼, 모두 그들〔러시아〕에게 병탄과 분할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찌 알기나 하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팔짱을 끼고 죽기를 기다리고 머리를 숙이고 명령에 복종하느라 바쁜 지경이다…예로부터 러시아의 잔학함은 사람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였고, 그 참혹함에 하늘의 해도 빛을 잃을 지경이었다. 2백년 전에 폴란드에서 마음대로 학대하고 경자년(1900년)에는 청나라의 북쪽지방에서 살해하고 노략질 한 것은 천하가 함께 듣고 함께 보고 함께 분개한 사실이다. 

    2) <독립정신>과 자주와 독립, 그리고 ‘공평외교’

    이승만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가능성이 커지자 국민들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그의 옥중 대표저술인 <독립정신>을 집필하여 그 해에 완성했다. 기왕에 기고한 <뎨국신문>과 <신학월보>의 논설들을 바탕으로 하고 그가 옥중에서 읽고 초역한 <만국사략>과 <중동전기본말> 그리고 <조선사기> 등의 내용을 자료로 하여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독립정신>에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자주란 “한 사람이나 한 나라이나 제가 제일을 하는 것”, 즉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말하며, 독립이란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 즉 홀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1)외교의 중요성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 책의 결론인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이라는 장에서 6개항의 ‘긴절한 강령’을 제시하고 그 세 번째 항목으로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할지라”고 강조했다. 6개 강령의 나머지는 개방정책, 새로운 문물(文物), 국권 중시, 국제적 의리 중시, 자유의 중시이다. 이승만은 외교 항목에서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 나라를 부지하는 법으로 알아야 할지니 만약 외교가 아니면 형세가 외로워서 남의 침탈을 면할 수 없는 고로 세상에 아무리 강한 나라도 외교상에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두려하는 바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라가 외로이 있으면 강국이 졸지에 침노할지니 여러 나라가 합하여 한 이웃이 되어 서로 관계를 맺고 지낼 진데 남이 어찌 나의 약함을 인연하여 법외에 일을 행 하리요”라고 말함으로써 국가간의 우호관계 내지 동맹의 중요성과 외교적 고립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이것이 “곧 잔약한 나라들이 강국 사이에 있어 능히 보존하는 근본이요”라고 말함으로써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적 안전을 지키는 길임을 역설했다.

    (2) '공평외교'

    이승만은 외교를 잘 하기 위한 방안으로 외교의 중요성 인식, 공평한 외교, 국제사회에의 적응력 증진, 진실한 외교, 불법외국인에 대한 단호한 처벌의 5개 항목을  제시했다. 이들 중 각국에 대한 공평한 외교는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외교를 돈독히 하고자 할진데 마땅히 공평하므로〔써〕주장을 삼을지라”고 역설했다. 이승만은 과거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을 때 이에 응해 통상조약을 맺었더라면 청국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이승만은 또한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을 하지 말고 일본과 러시아를 공평하게 대했더라면 영국 미국 등 각국이 공평한 입장에서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여 다른 나라들의 잘못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 미국에 대한 호감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어서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완전케 하기 위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이 제시한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정책’ 가운데 고종과 조정대신들 다수가 찬성한 연미국 대목에는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독립정신>에서 4개 장을 할애하여 미국 민주주의제도를 논하면서 미국이 부강한 이유를 미국의 정치제도 덕이라고 언급했다. 

    (4) 반일・반러 사상의 배경

    이승만은 조선정부가 과거에 청국에 의존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다가 청국이 쇠퇴하자 일본과 러시아에 기대어 주권을 지키려하지만 두 나라는 조선에 대해 영토와 주권을 침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만의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이 같은 불신감과 경계심은 이미 그가 약관 20세인 1898년 배제학당의 학생회 기관지로 주간신문인 <협성회보>와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인 <제국신문>에 기사를 쓸 때부터 생긴 것이다.

    그의 <독립정신>에서는 ‘아라사 정치내력’과 ‘일본정부의 주의’라는 두 개의 장에서 두 나라의 침략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승만의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일본의 한국침략이 현실화되어 한국병합에 이르게 되자 평생 동안 증오심으로 변했다.

    러시아에 대한 불신은 공산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하고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자 이승만으로 하여금 반공외교의 챔피언이 되게 했다. 그는 해방 후 하지 미군사령관으로부터 그의 반소행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후원해서 성립할 어떤 정부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올리버 박사를 통해 전해 듣고도 그의 반소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3) 카츠라-태프트 밀약과 대미관 변화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면 그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을 수중에 넣으려는 기세를  보이자 이승만은 1904년 11월 조정의 명령을 받고 미국에 정부밀사로 파견되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했을 때 체결한 수호조약에 양국은 제3국이 어느 일방에 대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 주권침해 등 행위가 있을 경우에는 서로 돕기로 한 상호지원 조항을 넣은 것에 근거,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을 미국에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먼저 이듬해 1월 15일 <뎨국신문> 주필 신분으로 <워싱턴 포스트>와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의 침략야욕을 폭로했다(기사 게재는 17일자). 그는 이어 2월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았다. 조선에서의 미국 선교사의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헤이는 미국이 조약상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당시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게 되어있는 러일 강화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헤이가 그해 7월 병으로 죽자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승만은 가까스로 윌리엄 태프트 전쟁(육군)장관의 소개장을 받아 8월 4일 뉴욕 근교에서 하와이 거주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는데 성공했다. 루즈벨트는 이승만이 지참한 탄원서에 관해 “주미한국공사관을 통해 국무부에 보내면 개인적으로 접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 말은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이미 며칠 전인 7월 31일 태프트 육군장관과 카츠라(桂太郞) 일본 수상 간에 비밀협정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이 밀약은 일본이 필리핀을 미국의 식민지로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무자비한 권력정치에 크게 분개하고 실망했다. 이승만은 그 후 기회 있을 때 마다 미국 측에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것은 참으로 미국 역사의 영광스러운 폐이지들 위에 찍힌 하나의 오점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이승만은 그의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주저앉아 유학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에드우어드 엘리어트 교수의 반에서 국제법 강의를 들었다.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간의 흥정으로 국제법은 있으나 마나 한 사실을 깨달은 그는 나중에 동료학생들에게 국제법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런 강의를 들었으니 등록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취지의 농담을 자주 했다고 한다. 

    4) 학위논문에 나타난 그의 관심

    이승만은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이 영향을 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제목의 국제법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국제법을 전공한데는 일찍이 한국인들은 외국에 대한 지식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 자신의 평소 믿음이 작용한 것 같았다. 즉 그는 <독립정신>에서 다른 나라 사람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한다. 청나라의 역사책만 공부하지 말고 여러 나라의 역사책과 그들의 정치 종교 문화에 관한 책을 구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그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는 의미에서 국제법, 그 중에서도 중립에 관한 연구를 함으로써 학위논문까지 쓰게 되었다. 이 논문은 미국식 국제법연구가 아직 초창기였던 당시 시점에서 학문적 독창성도 있었지만, 그 의의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승만의 중립연구는 그의 지론인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필요한 이론적 준비 작업, 즉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독립운동 전략이론’-다시 말하면 미국의 중립법제도에서 한국 국권회복의 활로를 찾는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한반도 중립문제는 그가 미국에 유학하기 이전인 1880년대에 이미 유길준이 제기한 한반도 영세중립론을 계기로 논의가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영세중립은 한국의 독립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는 이런 동기도 작용해서 그 후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서 미국식 중립제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착수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의 주목을 끈 사실은 미국 특유의 중립법 이론에 근거하여 미국이 유럽의 식민종주국에 반란을 일으킨 중남미 여러 곳의 식민지에 대해 독립을 승인한 점이다. 미국식 중립법은 1823년 12월 먼로독트린을 탄생시켜 이에 기초한 신생국가 승인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먼로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유럽국가들 끼리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전쟁을 할 때 우리는 절대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손해를 입고 항의하거나 우리자신의 방어를 위해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침해당하거나 중대하게 위협받았을 때에 한정된다.…〔중남미의〕신생국들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에서 우리는 신생국들에 대해 국가승인을 하면서 중립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원칙을 고수했으며 미국의 안전에 불가결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고수할 것이다.”

    이승만의 먼로주의 이론은 1941년에 쓴 일본관련 저서인 Japan Inside Out에서 더욱 구체화했다. 그는 미국이 서반구, 즉 남북미주에서 먼로주의로 21개국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점에 비추어 시의적절한 노력을 통하여〔아시아 등 동반구에서도〕세계적 민주주의국가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어 전체주의자들의 책동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같은 노력을 하지 않은 탓으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세계를 3개 지역으로 분할할 것을 책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독일과 이탈리아 두 추축국은 유럽을 지배하고 일본은 캘리포니아 해안에 이르는 태평양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를 지배하며, 미국에 대해서는 먼로주의를 남북미주 지역에만 적용시키는데 만족하게 하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것은 먼로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시발점이자 민주주의의 대의(大義)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며 인도주의 대의에 대한 중대한 침해요 미국의 커다란 과오가 될 것이라고 이승만은 경고했다. 

    이승만이 1차 대전 종결 후인인 1919년 초 국제연맹에 제출했다가 신채호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맹렬한 반발을 사고 결국 상해임정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된 그의 한반도 위임통치안도 이 같은 미국식 중립주의에 대한 그의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는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가 우선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다음 단계로 독립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 같다.  

    5) 워싱턴 군축회의와 이승만의 투지

    이승만은 그 후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린 군비축소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 당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역사적 회의에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대한민국대표단’을 참석시키려고 그해 10월 1일 찰스 휴즈 국무장관 등 미국대표들에게 연명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국무부 극동국은 “한국은 현재 아무런 국제적 지위도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이 나라와 1905년 이후 어떤 외교적 접촉도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대표단의 청원서를 문서철에 보관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휴즈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은 이에 물러서지 않고 같은 달 10월 중순 워런 하딩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발송하고 한국을 피침략국으로 인정하여 대표단의 회의 참석을 허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정의 움직임을 탐지한 일본정부의 강한 압력을 받고 있던 미국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살해 버렸다.

    다시 크게 실망한 이승만은 국제사회의 이상(理想)이나 원칙보다는 자신들의 국익과 힘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국제권력정치 현실 앞에서 거듭된 좌절을 맞보았다. 그는 이제 한층 강인한 자세가 되어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온 몸으로 부딪치게 된다. 2차 대전 기간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대여, 그리고 재미한국인청년들의 파병 요구 등 그의 끈질긴 요구를 계속 물리친 미국무부는 사실상 그를 기피인물로 취급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미국정부에 교섭을 벌였다.

    6) 국익 위한 연미(聯美) 노선

    이승만은 건국 후 1948년 7월 24일 대통령취임사에서 “세계 모든 나라와 친선해서 평화를 증진하며 외교 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를 강조했다. 그는 이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히 하는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교의 자주성과 공산권 국가에 대해 상호주의를 역설했다. 그는 또한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각국이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이 일본의 선전만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일본과 미국을 비판했다. 

    그는 취임 직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기념식 연설에서 “모든 우방의 호의와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문제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한미(韓美)간의 친선만이 민족생존의 관건”이라고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또한 그해 9월 30일 정기국회 개원식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대독한 시정방침 연설에서 “미국 중국(자유중국) 필리핀 등 우방은 과거에도 우리의 참 벗이었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더욱 고락과 운명을 공동히 하고 참된 벗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는 극동우호국가들과 더불어 일본의 금후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주의의 완전포기와 민주주의적 재건에 엄정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일경계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또 한국은 대일강화회의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석하도록 연합국에 요청할 것이며 한국은 대일배상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대일강경자세를 천명했다.

    이승만은 건국 직후 장면 대사를 포함한 3명으로 워싱턴에 주미대사관을 개설했을 때 그의 심경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승만은 해방 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을 도왔으며 1948년 말 막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하려던 유학생 한표욱을 신설되는 주미대사관 일등서기관에 임명하기 위해 미국에 주저앉히면서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필립, 자네도 알다시피 미국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나라다. 우리가 미국 덕분에 독립했고, 또 단독정부도 수립했다. 앞으로도 미국과는 특수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대미정책 기조는 미국 추종이 아닌, 실용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연미(聯美)와 용미(用美)전략이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 미국의 한국 배신을 직접 당했고 전쟁 중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소련과의 협조정책 때문에 한국 임정의 절박한 승인 요구를 모두 거부한 사실에 실망한 그는 미국에 대해 항상 경계심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런 말을 외무부 간부들에게 곧잘 했다.

    미국은 과거 대한제국 말기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를 독립국가로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포츠머츠에서 일본과 제정러시아의 강화조약을 주재, 극동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한일 합병시 우리를 돕지 않았던 점을 명심하라.

    일본이나 일본 상사에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미국도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침략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미국무부는 친일파의 소굴이며 국무부 안의 친일파들은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이다. 

    이승만의 대미불신감은 미국 측에도 거침없이 표시되었다. 그는 1953년 6월 17일 주한미국대사 브릭스를 불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6월 6일자)에 대한 자신의 회신을 수교하면서 미국의 역사적 책임을 언급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회신에는 미국비판 내용을 쓰지 않고, 브릭스에게 구두로 말해 본국에 이를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서한은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는 내용이었는데, 이승만이 보낸 회신은 그에게 한미동맹조약의 체결을 거듭 요청하는 것이었다. 브릭스가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6월 17일자)에 담긴 이승만의 미국 비판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지배에 관련된 미국의 책임-이승만 대통령은 1904년 미국정부가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을 위반하여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자유행동권과의 교환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심에 개입하지 않기로 동의했다고 말했다.

    ② 1945년 미국은 38선에서의 자의적인 한반도 분단을 러시아와 합의했다. 미국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성실한 자세로 행동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분단의 성립을 묵인함으로써 자의적인 38선이 오늘날까지 한국의 통일을 막는 상황을 조성했다. 

    ③ 미국정부는 1950년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침공하도록 조장한 책임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복해서 말하기를, 그런 성명서가 직접적으로 1950년 6월 25일의 침략을 초래했다.

    ④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어, 뉴질란드, 필리핀, 그리고 일본과 방어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한국도 미국과 비슷한 조약을 맺을 자격이 있다.

    ⑤ 한국은 오늘날 공산주의자들로 부터의 보호를 위해 방어조약이 필요하지만 내일에는 일본에 대한 보호를 위해 필요할지 모른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궁극적인 지배욕을 전혀 버리지 않았다고 선언했으며 이승만에 의하면 이 같은 사실이 현재 한미방위조약 교섭을 반대하는 일본 언론의 보도공세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55년 5월 부임해온 레이시 신임 미국대사를 착임 5개월 만에 기피인물로 규정해 추방했다. 레이시는 필리핀 공사로 근무하던 중 주한대사로 승진한 인물인데, 그는 2년 전 필리핀 대통선거 때 현직 대통령인 퀴리노를 실각시키고 야당인 막사이사이 후보를 지원해서 당선시킨 경력을 가졌다. 레이시의 한국대사 부임도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는 정보가 경무대에 들어왔다. 또한 레이시는 부임 후 오만하게 행동해 물의를 빚었다. 

    이승만은 이 무렵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 대사들이 한국에 부임해 오면 장관과 심지어 국회의장까지 공항에 영접하러 나가는 부끄러운 모습이 반복되자 외무부에 엄명을 내려 외무차관 이하가 공항에 나가도록 했다. 

    3. 이승만의 7대 외교업적

    이승만은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중 대표적인 외교업적은 다음과 같다.

     1) 건국외교(반탁외교, 정부수립외교)
     2) 북한 남침격퇴와 호국외교
     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4) 반공포로석방
     5) 평화선 선포
     6) 경제부흥외교
     7) 해방 이전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4. 이승만의 자주외교 사례

    이승만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당시부터 계산하면 1960년 4・19학생의거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에 걸쳐 미국을 상대로 국익 본위의 외교를 폈다.  그의 대미외교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때까지는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일환으로, 1948년부터 1960년까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정부차원의 대미외교를 직접 벌였다. 이승만은 역대 미국행정부, 특히 휴전을 강행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관계는 뒤에 설명한다. 그가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주적 외교를 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을사보호조약에서 해방 까지

    ① 러일전쟁 후 미국의 중재요청과 임정 승인과 한반도 위임통치 청원(1905〜19)
    ② 워싱턴 군축회의 대표자 파견 외교(1921)
    ③ 국제연맹에 일본 규탄 교섭 외교(1933)
        이승만(임정 초대 대통령 자격), 스팀슨 발언 계기로
        1940.1. 11일자 NYT에 미국의 대일정책 변경 촉구 편지 게재
    ④ Japan Inside Out 발간(1941)
    ⑤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획득 외교(1941〜45)
    ⑥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대여 교섭(1943〜45)
    ⑦ 태극우표 발행(1944)
    ⑧ 한인무장부대 편성 교섭(NAPKO작전, 1941〜45)
    ⑨ 광복군 특수부대 훈련(독수리작전, 1944〜45)
    ⑩ 얄타밀약설 제기(1945)
    ⑪ 유엔창립총회 참석 교섭외교(1945)
    ⑫ 반탁외교와 단정수립 외교(1945〜47)

    2) 건국시기

    (1)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과 미국의 견제(1948)
    (2) 철군 연기 및 대미군원 외교(1949)
    (3) 태평양동맹 추진과 미국의 거부(1949)

    3) 6・25전쟁 시기

    (1) 북한의 남침 격퇴와 호국외교(1950)
    (2) 평화선 선포(1952)
    (3)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제거 계획(1952)
    (4)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1952〜53)

          아이젠하워의 1953년 7월 24일(휴전협정 조인 3일전)자 일기 중 이승만 관련부분

    한국과 이승만의 상황을 쓰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다. 공산주의자들과 대한민국 양쪽 모두 전투를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교섭의 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제기하고 있다. 내 마음속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는 지역에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엔군이 또 다시 들어가야 할지 여부에 심각한 의문이 일고 있다. 그 어려움은 길고도 쓰디쓴 경험이었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남한으로부터 〚미군의〛 철수가 일본을 불리하게 노출시킨다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 유엔의 다수 국가들이 오래전부터 군대를 빼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확신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이승만이 완전하게 비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완강하게 반항적이었던 사례의 긴 리스트를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엔은 침략자를 격퇴하려고 한국에 간 것이지 힘으로 한국을 통일시키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휴전은 유엔이 그런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고 또한 한국을 통일하고 중공군과 연합군 양편의 철수를 실현하기를 바라는 정치적 교섭을 시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승만과 공산주의자들은 너무도 많이, 밀고 당김과 우유부단함과 의심과 좌절감을 일으켰기 때문에 설사 휴전이 성사된들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우리는 양측에 대해 극도로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상대가 될 적은 공산주의자들이지만 이승만은 가장 강력한 용어로 비난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불만족스러운 동맹자이라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5) 상호방위조약 체결(1953)

    4) 휴전 이후 시기

    (1) 국군 전력 증강 외교(1953)
    (2) 전후 부흥 경제지원 교섭(1953)
    (3) 미국의 PATO(태평양 아시아 조약기구) 구상과 이승만의 거부(1954)
    (4) 미국방문과 아이크와의 설전(1954.7.30., 한표욱, pp. 231〜236)

    ① 2차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일본과의 친선관계 조항으로 언쟁

    ② 의회연설에 대한 미국 언론의 혹평(NYT, 1954.8.1.)

    NYT-"미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정책을 대담하게 반대한 불행한 연설" 

    WP-"이승만 대통령의 호전적인 제안은 오로지 대경실색만을 불러일으켰다"

    ③ 사설 비판 독자편지(NYT, 1954.8.6)

    "우리 자신이 공포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왜 우리가 이승만의 연설을 불행한 연설이라고 규정해야 하는가…불행하게도 진리가 미국에서는 점점 인기없는 것이 되고 있다…미국에서 태어난 공산주의자들은 학교 교실에서 학습에 필요한 모든 특혜를 누리면서도 그들은 사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폭 넓은 지적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 팽창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무서운 현실을 힘으로 반대해야할 필요성을 이해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승만은 특이하다. (우리는) 지금부터 10년이나 15년 후에는 그의 연설을 회고하면서 그의 계산된 용기를 찬양하고 우리의 비겁한 태도를 개탄할 것이다"(Jeannette Druce).

    ④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 장군은 같은 해인 1954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가 휴전을 이룩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는 운동을 벌인데 대해 우리 미국인들은 어떤 비판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죄악에 대한 이승만의 변함없는 증오심, 침략자에 대항해 목숨을 바치면서 싸우도록 국민들을 고무하는데 있어서 그가 보인 영도력, 그리고 고국의 한 조각의 귀중한 땅도 붉은 독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쟁에서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으려는 이승만과 한국 국민들의 각오에 대해 우리는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국에 있어서의 우리의 반공전략에 관한 논란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완전하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한국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을  위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에서 군사적으로 패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한 것은 미국보다 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5) 장기집권과 미국의 내정간섭(1956〜59)
    (6) 4・19와 이승만의 패배(1960)

    5. 이승만 외교의 평가

    1) 이승만 외교의 목표와 방법적 특색

    이승만 외교의 목표와 방법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1) 외교목표-자주독립국가 건설과 남북통일 실현
    (2) 자주성 견지(연미, 용미)
    (3) 탁월한 식견 바탕 정책수립
    (4) 상대국 여론과 의회 통한 전방위 외교
    (5) 외교정략 구사
    (6) 개인외교

    2) 이승만 외교의 교훈

    이승만의 대미 자주외교가 오늘날 우리 외교에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외교의 중요성
    (2)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
    (3) 자주성과 국제협력 원칙 조화
    (4) 외교정책 수립의 창의성과 현 한반도 정세에 주는 교훈
    (5) 반일노선과 한일협력문제 
    (6) 개인외교의 장단점(미국의회 연설문)

    3) 이승만의 반공주의 재평가

    이승만에 대해서는 극우적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의 반공노선을 폄하는 경향이 많았지만 공산주의가 70여년의 실험 끝에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냉전과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당연히 재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1)그레고리 핸더슨의 이승만 평가

    그의 신념의 단순명쾌함-논쟁적 지적 고뇌 없는 민족적 정신적 통일론과 애국주의-은 지식인들과 좌익반대세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2)이승만의 ‘자유수호의 선구자’-반공노선에 대한 성찰 

    이승만은 선명한 반공주의자이기는 해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반동적 정치도자는 아니었다. 1946년 2월 발표한 그의 건국비전인 ‘과도정부 당면정책 33개항’은 토지개혁과 최소임금제도를 제시하는 등 사회개혁과 복지정책을 강조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통과된 헌법은 혼합경제체제를 택하는 등 당시로서는 시대에 앞선 헌법이었다. 이승만은 건국 직후 최초로 1948년 12월 11일 창당한 조소앙의 사회당 결성대회에 비서관을 보내 대독시킨 축사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사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익정당 일색인 마당에 사회당이 생긴다니 반갑고, 더구나 조소앙 선생이 이 당을 한다니 반갑다”고 말했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공산주의는 러시아에게 재앙이었다”라고 선언한 공산주의사상과 냉전을 재평가해야 할 시점에 와있는데, 이승만의 반공주의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과거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쟁광이라고 조롱한 레이건 대통령이 동유럽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은 것을 참고해야 한다. 소련을  ‘악의 제국’ 이라고 규탄하는 연설(1983)을 한 레이건은 재임 중 꾸준하게 ’힘을 통한 평화’를 밀어붙였다. 그의 브란덴부르크 연설(1987.6.12.)은 역사적 명연설로 베를린 장벽 붕괴(1989.11.9.)의 한 계기가 되었다.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동유럽 각국에서 그의 동상이 건립된 역사적 흐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반공노선도 올바르게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끝]

    발표자 남시욱:

    1938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사,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
    동아일보 동경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실장, 상무이사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회장, 문화일보 사장
    고려대 석좌교수, 세종대 석좌교수
    동아대상, 서울언론인클럽 칼럼상, 위암 장지연상, 중앙언론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홍성현언론상,임승준자유언론상, 인촌상, 서울대언론인상
    저서: 항변의 계절, 체험적 기자론, 한국보수세력 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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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223D9BDB65DDB83B&feature=pl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