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 지난 6, 통영 경상대학교 건물에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통영 출신으로 북한 요덕 수용소에 갇혀 있는 신숙자 모녀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이 전시회를 본 통영 사람들을 중심으로 북한 요덕수용소에 억류된 신숙자씨를 구하자는 서명이 있었고, 그 후 신숙자 모녀 구출을 촉구하는 서명이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숙자씨는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씨의 부인이다.

    1942, 통영에서 태어난 신씨는 통영초등학교(45)와 통영여중(9)을 거쳐 마산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로 건너갔다. 신씨는 튀빙겐대학 부속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유학생 오길남씨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다.
    그 후 두 딸(혜원,규원)을 낳고 독일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남편 오길남씨가 작곡가 윤이상과 김종한, 재독학자 송두율 등 친북인사들의 유혹에 넘어가면서부터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오길남씨가 친북인사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여러 원인이 있었다.

    당시 그는 마르크스 이론에 심취한 상태였으며 반한 단체인 민건회에 가입,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반한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1980년엔 독일로 망명까지 한 상태였다. 북한이 이용해먹기 좋은 사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당시 그는 독일유학 15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당시 나이가 43세여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는 것은 '민건회' 활동 경력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 신숙자씨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 혈액을 다루던 중 간염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야채상 김종한이 입북을 권유했다. 독일에 살고 있던 유명 작곡가 윤이상 역시 북에 가서 경제학 연구를 열심히 해보라고 적극 입북을 권유하였다. 이들을 통해 접촉한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그에게 입북시 경제학 교수자리를 주고 아픈 아내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고민하던 오길남은 결국 입북을 결심했다. 아내 신숙자 씨는 입북을 한사코 반대했지만 남편의 뜻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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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북한에 들어가자마자 오길남은 자신이 큰 착각한 것을 깨달았다. 북한은 오씨 가족을 석달간 동북리 초대소에 가두고 세뇌교육을 실시했다. 초대소 생활이 끝난 후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대남 흑색 선전방송국인 "구국의 소리" 방송요원 자리였다.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5개월 뒤, 대남공작기구 책임자인 리창선(사회문화부장 역임, 2002년 사망)이 독일에 유학 중인 한국 유학생 2명을 입북시키라는 임무를 내렸다. 상심한 오길남은 이 사실을 아내 신씨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신씨는 오길남에게 탈북을 권유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탈북을 권유하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돼요.

    자주니 평화니 민족 대단결이니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피와 살이 되어야 마땅한 값진 것들로 전쟁 준비를 하느라 탕진하여 이곳 주민들은 허기져 있고 모두들 지쳐있어요. 사회주의라는 것도 아무런 내용물 없는 빈 껍데기나 베 쪼가리처럼 바람에 찢겨 펄럭거리는 허깨비에 불과해요. 무상 교육 제도, 무상 의료 제도 나발을 요란하게 불어대지만 모두가 다 빈 깡통이에요. 의약품도 없는데 무슨 의료 제도예요, 당신, 인민들에게 나눠 줄 볼펜 하나 변변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고 선전해대지만 치사(致死)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년퇴직 하면 한 달에 20원씩 받아요. 필터가 달린 담배 한 갑 값이죠. 이런 땅이 지구촌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이렇게 살려면 차라리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올가미에 씌워서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이곳에서 빼내 주세요. 그렇게 안 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 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 속에 있겠어요.

    백 번 거짓말하다 보면 한 번은 속아 넘어 간다고 보는 대남 사업 방송 기구의 앵무새 방송원 노릇하려고 반평생을 밤잠 설쳐 가며 공부했어요? 아니잖아요. 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돼요.

    도망치세요. 우리야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자기들의 체제가 병약하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 그러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거예요. 준이 엄마(송두율의 처)도 민중이 엄마(김종한의 처)도 앙큼한 여자들이에요. 나도 앙큼해져야겠어요. 독기 찬 저주를 독일에 사는 여자들에게 보내고 싶지만 억제하겠어요.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 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 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
    나가세요."


    신숙자씨의 마지막 말은 정말이지 심금을 울리는 유언처럼 느껴진다. 남편이 탈출하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모를리 없었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남편에게 탈출을 강력하게 종용했다.

     

    1986 11, 오길남은 가족을 지옥과 같은 북한에 두고 유럽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북한 공작원 2명이 동행했다. 오길남은 탈출 기회를 노리던 중,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에서 동행한 북한 요원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오길남은 독일에 5년간 머물면서 자신에게 입북을 권유했던 윤이상에게 찾아가 북한에 남은 가족을 독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경제학 교수로 열심히 살아보라고 꼬드기던 늙은 작곡가는 여전히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재입북을 권유했다. 오씨가 거절하자 윤이상은 쌀쌀한 태도로 돌변, 가족들의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까지 했다.

     

    이때 윤이상이 오길남을 어떻게 협박했는지 한번 그 내용을 들여다 보자.


    “당신은 연락소 비밀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런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과 다를 바 없다. 당신이 미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니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왜 북을 욕하고 다니는 것이오. 통일운동을 훼방 놓고 다니면 당신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

     

    윤이상. 그는 현대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구상 최악의 범죄집단인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에 예속된 정신 나간 지식인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북한을 자주 들락거렸지만 윤이상은 북한의 문제점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윤이상이 지구상 최악의 정권을 찬양하고 순진한 사람을 꼬드기는 악마 같은 짓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북한의 문제점을 설명하면서 독일에서 조용히 살겠으니 가족을 돌려보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에게 미제간첩 운운하고 가족 죽을 줄 알라고 협박하는 모습에서 필자는 늙은 사기꾼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아무런 연줄도 없는 오길남에게 미제간첩은 또 무엇인가? 윤이상과 그 유족들에게 묻는다. 무조건 북한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게 미제간첩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윤이상의 고향은 통영인데, 신숙자씨 또한 통영 출신이다. 윤이상은 동향 사람을 지옥 같은 수용소로 보내놓고도 진실을 외면하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아무리 음악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하지만 과연 저런 늙은이가 통영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까?

     

    윤이상이 가족의 송환을 매몰차게 거절하자 결국 오길남은 1992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UN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에 가족을 송환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냈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과 규원씨는 1987년 말 요덕 수용소 혁명화 구역으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 강철환, 안혁씨는 요덕 수용소 12번 마을에 신숙자 모녀가 살고 있었으며 신숙자씨가 몇 차례 자살시도를 했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요덕 수용소 혁명화 구역에서 신숙자 모녀가 발견되지 않아 건너편에 있는 완전 통제구역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완전 통제구역은 석방이 허용되지 않은 종신 수용소이며 현재 신숙자와 모녀의 생사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