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출 호소하자 야채상(김종한) 돌변...“개XX, 내가 개XX의 XX들과 무슨 관계?”
  • ▲ 사진 = 지난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가 북한 공작 조직에 연계된 자들을 공개한 자료다. 가장 오른편에 있는 인물이 바로 '김종한'이다.(사진출처 = 국회도서관)
    ▲ 사진 = 지난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가 북한 공작 조직에 연계된 자들을 공개한 자료다. 가장 오른편에 있는 인물이 바로 '김종한'이다.(사진출처 = 국회도서관)

     북한에 억류 중인 ‘통영의 딸’ 신숙자 씨(69) 모녀 월북 사건에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가이지만 동족 수백만명을 죽인 김일성에 평생 충성을 다한 윤이상만 연관된 게 아니다. 독일에서 야채상을 하고 있는 ‘김종한’ (71)이 윤이상과 함께 주도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 ▲ 오길남박사가 부인의 권유로 북한을 탈츨한 뒤 입북을 권유한 윤이상에게 가족의 구명을 호소했다. 윤이상은 북에서 건네받은 이 사진을 건네주면서 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은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이 사진의 배경이 요덕수용소라고 증언하고 있다.
    ▲ 오길남박사가 부인의 권유로 북한을 탈츨한 뒤 입북을 권유한 윤이상에게 가족의 구명을 호소했다. 윤이상은 북에서 건네받은 이 사진을 건네주면서 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은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이 사진의 배경이 요덕수용소라고 증언하고 있다.

    오길남(69) 박사는 1985년 12월 유학생활을 하던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의 공작에 넘어가 부인 신숙자 씨(69)와 딸 혜원(35)ㆍ규원(32)씨를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오 박사는 "먼저 탈출한 뒤 우리를 구출해달라"는 부인의 권유로 북한을 탈출, 부인과 두 딸 구명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규원은 지금도 북한에 잡혀 있다. 공교롭게도 신숙자씨는 윤이상과 같은 통영 출신. 이 사건이 '통영의 딸'로 불리며 널리 알려지면서 '오 박사 가족을 속여 월북을 유도한 주요 인물이 작곡가 윤이상'이라는 언론 보도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 박사는 2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작곡가 윤이상은 당시 북한의 대남 공작총지휘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지시를 했을지는 몰라도 나를 포섭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한 것은 김종한이다.”라고 밝혔다.

    오 박사는 지난 6월 6일 발행된 자신의 책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에서 “김종한은 나에게 북한 공작원을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이라고 밝혔다.

  • ▲ 수백만명의 한국인을 죽게 만든 북한 김일성에 충성을 다한 작곡가 윤이상의 동상과 흉상은 통영 윤이상기념관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사진 아래) 흥남 철수 작적에서 10여만 피난민을 구출한 6.25 전쟁영웅을 기리는 거제도의 김백일장군 동상은 종친초(종북-친북-촛불군중)세력에 의해 거적과 쇠사슬로 모욕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사진 위) 이 두 동상의 명과 암이 전도된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 수백만명의 한국인을 죽게 만든 북한 김일성에 충성을 다한 작곡가 윤이상의 동상과 흉상은 통영 윤이상기념관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사진 아래) 흥남 철수 작적에서 10여만 피난민을 구출한 6.25 전쟁영웅을 기리는 거제도의 김백일장군 동상은 종친초(종북-친북-촛불군중)세력에 의해 거적과 쇠사슬로 모욕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사진 위) 이 두 동상의 명과 암이 전도된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김종한은 당시 오 박사에게 “북한은 오 박사를 경제학자로 모셔가려 하고 있다” “남한은 엉터리 국가인 반면, 북한은 민족 통일을 이룰 만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며 월북을 권유했다.

    이와 관련, 1992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도 보도자료를 통해 김종한의 간첩활동을 설명한 바 있다. 안기부 자료에 따르면, 오길남 박사는 1985년 12월 독일 유학중 일가족 3명과 함께 입북했다 독일로 재탈출, 망명생활을 하다 자신의 간첩활동을 자수하고 입국했다.

    오 박사는 1985년 7월 독일 브레멘大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 후 직장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신 씨가 간염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오 박사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교포 김종한이 오 박사 가족에게 입북을 권유했다. 김종한은 그 전부터 오 박사와 그 가족 주변을 돌며 독일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야채상 주인이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오 박사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김 씨의 유혹을 못 이긴 오 박사는 구라파의 북한대남 공작책 백치완 등에 가족과 함께 인계돼 월북했다.

    오 박사의 책에는 그가 월북 후 다시 독일로 홀로 돌아온 후 김종한과 통화한 내용도 나온다.

    오 박사는 “아내와 두 딸을 독일로 데려올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시오. 당신은 북한에 높은 사람들을 많이 알지 않소”라며 “그렇게만 해준다면 (김 씨가) 나를 택해 북한에 유인한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살겠소”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김 씨는 “개XX, 내가 개XX의 XX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는 거냐”며 욕설를 퍼붓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오 박사는 가족들 생각에 김종한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오 박사는 결국 ‘속았다’는 생각과 함께 자포자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 박사는 김종한과 연락이 끊어진 것을 계기로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 자수하게 됐다고 한다.

    오 박사는 “그때 서야 (김종한에게) 속았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었다. 배신을 당한 비참함은 형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종한의 '두 얼굴'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다.

    “월북 전에는 야채를 팔다 남으면 가져다주는 등 (김종한은) 매우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할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현재 그의 소식을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죄값을 받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오 박사는 “북한을 탈출한 후 5년 5개월 동안 가족을 찾기 위해 혼자 노력했었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면서 “다행히 한국에 온 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 ▲ 세계적인 작곡가이긴하지만 수백만명의 동족을 죽인 민족 도살자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한 윤이상도 통영 사람이다. 오길남박사의 부인 신숙자씨 역시 통영 사람. '통영의 딸'을 구하자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정기 촛불집회에 오길남박사(윤이상이 건넨 가족사진 왼편에 앉아있다)도 참석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뉴데일리.
    ▲ 세계적인 작곡가이긴하지만 수백만명의 동족을 죽인 민족 도살자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한 윤이상도 통영 사람이다. 오길남박사의 부인 신숙자씨 역시 통영 사람. '통영의 딸'을 구하자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정기 촛불집회에 오길남박사(윤이상이 건넨 가족사진 왼편에 앉아있다)도 참석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뉴데일리.

    한편 김종한은 오 박사 가족들을 북한으로 보내고 몇 년 뒤 재독교포를 대상으로 한 한글학교 '세종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김 씨는 15년 동안 이 학교 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