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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남북 베이징 비밀접촉에서 남측이 남북 정상회담을 세 차례에 걸쳐 열자 제의했다고 폭로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녹취록까지 공개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남북대화의 경색을 남측에 전가시키면서 남북 대결 국면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같은 북한의 폭로 공세에 대한 사전적 풀이를 ‘폭로전술’이라 하는데, 이는 상대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투쟁전술임을 뜻한다.
지금 외교적 관행을 무시한 북한의 이런 행위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김일성 3부자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감정적 분석’으로부터 지난 5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에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경제적 분석’이 있는가하면, 최근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정치ㆍ경제적 지원을 담보함으로써 무모한 대남공세를 전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최고 권력기관을 통해 당국 간 비밀접촉을 전례 없이 폭로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즉흥적인 반발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미국 등 주변국들을 상대로 한 고도의 외교적 손익계산에 따른 행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근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의 이해당사국들은 ‘선(先) 남북관계 개선, 후(後) 6자회담 개최’를 전제로 북한을 설득ㆍ압박하여 왔다.
지난해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북한은 외교적 공세에 몰렸고 국제사회의 대북비난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다각적인 외교를 통해 6자회담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이는 북한이 한국을 배제하고 6자회담 틀에서 미국과 직접 거래하는 ‘통미봉남’의 구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한ㆍ미ㆍ일의 공조에 올 초 러시아가 가담했고, 중국도 ‘남북대화 우선’이란 입장을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김정일의 방중 기간 한국은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주목하다가 정상회담 비밀접촉 폭로라는 역풍을 맞았다.
북한의 비밀접촉 폭로는 남북대화에 대한 인식차이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한국이 판단하는 남북대화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 일본에게 있어 남북대화는 북한의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남북문제를 핵문제와 연계시키는 한국이야말로 대화재개의 장애를 조성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각국의 인식차이에서 발생하는 틈새를 파고들려는 틈새전략을 노리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이번 폭로에서 북핵문제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정상회담 구걸’, ‘돈 봉투 제시’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정치적 성과를 거두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 폭로하였다. 이 같은 폭로는 그간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일관성 있게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국내 지지여론에 대해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것이다.
북한의 폭로에 따른 진위 여부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무모하게 남북 간의 비밀접촉을 폭로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와의 대화 재개가 사실상 난망하게 됐음은 물론, 차기 정부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개선에 있어서도 신뢰 상실이라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국제사회에서는 대립하는 국가 간에도 비밀접촉은 늘 있어 왔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안정적인 관계와 대립적인 국면의 완화 내지 해소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비밀접촉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수없는 비밀접촉을 통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 과정이나 그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도 모두 비밀접촉으로 성사된 사례들이다.
본래 폭로란 폭정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신뢰 부재의 사회에서의 일방적 발설을 뜻한다. 그간 북한은 정부 차원에서 살상무기와 마약을 대량 수출했고, 달러를 위조 사용했는가 하면, 테러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18만 명에 가까운 시민을 납치함으로써 ‘불량국가’ 또는 ‘깡패국가’란 비난을 받아왔다. 그런 북한이 이번에는 남북 간의 비밀접촉을 폭로함으로써 숨겨진 정체-마각을 만천하에 들어내고 말았다. 이 같은 ‘마각노출’이야말로 그들 스스로 불량국가요 깡패국가임을 국제사회에 보여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에 한심하고 안쓰럽기 그지없다.
장공자 충북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