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상까지 핍박받는 '建國·護國 대통령'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최근 세워진 이승만 동상이 누군가에 의해 붉은 페인트가 뿌려져 훼손됐다는 지난주 말 보도를 읽고 씁쓸했다. 이 동상은 당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던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옛 경남지사 관저에 자리 잡은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다. 해방 후 혼란기에 나라를 세우고 전쟁 중에 나라를 지킨 건국(建國)과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이승만을 보고 있는 필자에게 그 보도는 참담한 것이었다.

  • ▲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크게 두 종류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장기집권을 위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공산화가 되든 어떻게 되든 간에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분단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완벽한 정책을 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이승만의 경우는 식민지 상태에서 막 벗어난 혼란 상태에다가 6·25 전쟁으로 온통 파괴된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대통령의 행적에 비추어 보면 이승만의 독재는 국민에 의해 잊히고 지워지고 나아가 악인(惡人)으로 정죄(定罪)돼야 할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12년의 집권기간에 선거를 중지하거나 연기한 적이 없다. 또 야당 세력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키지 않았다. 경향신문을 폐간했지만, 그보다 영향력이 컸던 동아일보와 사상계는 그냥 둘 정도의 언론자유는 유지됐다. 건국 초기에 공산주의를 금지하지 않았던 그가 국가보안법을 운영하게 된 것은 막 출범한 나라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 여순사건이 일어난 다음부터였다. 자유주의자라 할지라도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는 반(反)국가단체의 자유까지 허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결정적인 잘못은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1956년에 헌법이 정한 대로 물러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자신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의 선례(先例)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 번째 출마를 사양했다. 그러나 그는 네 번째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선례를 들먹이면서 또 출마할 것을 부추기는 자유당 일부 세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붕의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1960년에도 네 번째로 다시 출마하는 큰 실수를 했다. 결국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에 말려들어 대통령직을 물러나게 됐다.

    이승만이 4·19 혁명 이후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군중이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박수를 보냈다. 1965년에 그의 관(棺)을 실은 운구차가 정동제일교회를 출발해 시청 앞을 돌아 동작동 국군묘지로 가는 길에도 구름같이 모인 서울시민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당시의 국민에게 이승만은 그 정도의 독재자였을 뿐이다. 그 이상의 사악한 이미지는 뒤에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부당하게 덧칠해진 것이다.

    지난 정권들은 박헌영의 처 주세죽, 김단야, 김철수, 여운형 등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건국훈장을 주는 대담성을 보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이승만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자취를 담은 박물관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