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유학, '혼자 힘으로' 미국학생들과 경쟁해서 이겨...'경쟁'에 대한 확고한 신념…정년심사서 '제자'를 떨어트린 '스승'독선, 소통부재 비판도…개혁 성과 이어나가되 갈등 줄이는 '조화' 필요
  • 학생 4명의 자살로 불거진 카이스트 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든 모습이다. 서남표 총장이 교수협의회의 혁신위 구성요구를 전격 수용하고 사상 처음 열린 학부생 비상총회에서 ‘서 총장이 개혁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안건이 부결되면서 서 총장에 대한 사퇴요구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그러나 학교 밖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한나라당 교과위 위원들조차 서 총장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는 서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불안의 씨앗 여전해…서총장, 교수협 ‘동상이몽’

    학교안에서도 서 총장과 교수협의회가 동상이몽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언제 다시 충돌이 일어날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 총장은 “학교 발전과 개혁지속을 위해 혁신위가 합리적인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교수협의회는 “혁신위를 통해 소통부재를 비롯한 밀어붙이기식의 학교운영이 크게 바뀔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 총장은 앞으로 혁신위에서 결정한 사안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 서 총장은 13명으로 구성되는 혁신위에 본인이 지명하는 5명의 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충분히 자신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교수협의회 역시 5명의 협의회 소속 교수가 혁신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번에야 말로 경쟁위주의 학교운영 방식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여기에 3명의 학생대표가 교수협의회와 같은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여 혁신위가 내놓을 개선안에 벌써부터 관심이 집중된다.

     

  • ▲ 서남표 KAIST 총장이 13일 학교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리는 학부총학생회 비상총회를 찾아가 학생들을 힘껏 안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 서남표 KAIST 총장이 13일 학교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열리는 학부총학생회 비상총회를 찾아가 학생들을 힘껏 안아주고 있다. ⓒ 연합뉴스

    혁신위, 또 다른 학내갈등의 진앙지 될 수 있어

    아직 구성도 되지 않은 혁신위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다른 데서 볼 수 있듯 서 총장과 교수, 학생들의 의견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혁신위가 과연 제대로 운영될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혁신위가 또 다른 학내갈등의 진앙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수와 학생들의 사퇴요구가 더욱 거세질 수도 있다. 학생비상총회에서 부결된 ‘서 총장 사과와 개혁실패 인정’ 안건이 과반수에서 단 10표가 모자랐다는 점은 서 총장에 대한 학생들의 정서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경쟁’을 중시하는 이유…‘혼자 힘으로’

    미국 학생들과의 ‘경쟁’서 이기다

    그렇다면 왜 서남표 총장은 그토록 ‘경쟁’을 중시할까? 서 총장에게 ‘경쟁’은 어떤 의미가 있을 까?

    1954년 이제 겨우 포성이 멈춘 서울. 서울사대부고를 다니던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젊은 날의 청년 서남표였다. 청년 서남표가 미국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버드대 한국어학과 초빙교수로 있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서울대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미 국무부의 도움으로 해외대학 시찰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대로 미국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앤 니콜스 고교에 입학한다. 사립학교였던 이 곳은 학생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서남표 천일의 기록(저자 지명훈 동아일보 기자)’이라는 책을 보면 1주일에 한권씩 소설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영어가 서투른 그는 ‘0’점을 받는 일이 많았으나 오직 혼자 힘으로 이겨냈다는 일화가 나와 있다.

    ‘혼자 힘으로’ 미국 고교생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서남표는 MIT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카네기멜론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서남표는 단 한번도 학기를 초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3년은 걸리는 박사과정을 20개월만에 마칠 만큼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모교 MIT에 영입, 학과장에서 석좌교수까지…‘경쟁’은 인생의 동반자

    한국이라는 낯선 동양의 작은나라에서 온 천재 공학도는 바로 미국 주류사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듬해 사우스케롤라이나대 강단에 선 그는 모교인 MIT에 영입돼 기계공학과장, 생산기술연구소장, 석좌교수 등을 거치면서 3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마찰공학, 제조 및 생산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미국 국립과학재단 공학담당 부총재까지 역임한다.

    학자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서 총장은 2001년 기계공학과 석좌교수로 카이스트와 첫 인연을 맺고 2006년 당시 김우식 과학기술부총리 등의 추천을 받아 13대 카이스트 총장에 오른다.

    서 총장의 일생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경쟁’이다. 서 총장에게 ‘경쟁’은 그와 인생을 같이한 동반자와도 같다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카이스트 총장에 오르자마자 학생들이 정해진 기간 안에 졸업하지 않으면 학위를 받기 어렵게 학사관리를 강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경쟁’은 당연한 생존의 법칙이다.

     

    ‘제자’도 정년심사서 떨어트려…美 과학재단 부총재 재직시, 직원반발에도 ‘경쟁원칙’ 끝까지 지켜

    경쟁을 얼마나 중시하는 지는 그의 미국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서 총장이 MIT에서 기계공학과장을 맡은 10년간 학과 교수의 40%가 학교를 떠났다. 학과 교수들의 정년보장 심사를 강화해 상당수 교수들이 그가 요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해 심사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심지어 자신이 학부와 박사과정을 지도한 제자를 심사에서 떨어트렸다는 일화도 있다.

    서 총장이 국립과학재단 부총재로 일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공리이론’을 도입해 조직의 인사 및 운영시스템을 전면 개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원 1,600여명이 서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을 백악관에 보내는 일까지 발생했지만 서 총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쟁’을 통한 개혁, 英 더 타임스 ‘공학/IT분야 21위’ 성과…소통부재, 독선 비판도

    그에게 ‘경쟁’은 개인과 조직, 사회전체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이들은 스스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경쟁’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경쟁’은 곧 그의 삶 전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경쟁에 대한 그의 신념이 다시 심판대에 올랐다. 개혁과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독선이라는 날 선 비판이 거세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같은 외고집과 소통부재가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는 것이 서 총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일부 잘못된 측면은 있으나 그가 제시한 방향은 맞다는 변론도 있다. 소통을 강화하고 학생과 교수의 부담을 줄이되 그의 개혁정책이 가져온 성과마저 무시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실제 서 총장 부임후 카이스트에 대한 대외 평가는 긍정적이다. 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대학 평가(공학/IT분야)에서 카이스트는 2008년 34위, 2009년 21위에 오르는 등 연구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근본적 사태 해결위해서는 이분법적 논리 아닌 ‘조화’ 필요해

    카이스트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에서의 보장된 안락함을 버리고 반세기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끝을 맺을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카이스트 문제는 단순한 학내 분규가 아니다. 서 총장 사퇴도 근본적인 답은 아니다. ‘모 아니면 도’식의 어느 한 쪽을 완전히 배제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익은 취하되 갈등은 조절하는 ‘조화’가 필요하다. 우리 과학계의 미래를 위해 ‘개혁’의 성과를 이어나가면서도 역기능을 줄일 수 있는 혜안이 절실한 시점이다.